출판계 달군 ‘대망 사건’ 결론…대법 “대망 재출간, 저작권법 위반 아냐”

2020.12.21 09:00 입력 2020.12.21 18:06 수정

동서문화사(현 동서문화동판)가 2005년 재출간한 대망(왼쪽)과 솔출판사가 2000년 출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오른쪽).

동서문화사(현 동서문화동판)가 2005년 재출간한 대망(왼쪽)과 솔출판사가 2000년 출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오른쪽).

해외저작물의 저작권을 보호하지 않던 시절 일본 역사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무단 번역한 출판물 <대망(大望)>의 개정판을 2000년대에 다시 내면서 출판사가 원저작자의 허락을 구하지 않은 것은 저작권법에 위배된다는 1·2심 판단을 대법원이 뒤집었다.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작가이자 번역가 고정일씨(80)와 그가 대표로 있는 출판사 동서문화동판(엣 동서문화사)의 저작권법 위반 혐의에 대해 벌금형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무죄 취지로 2심 법원에 돌려보냈다고 21일 밝혔다.

사건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5년 동서문화사가 출판한 대망은 도쿠가와를 주인공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다룬 역사소설이다. 일본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가 1950년부터 1967년까지 집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번역서이다. 일본에서 단행본이 1억부 넘게 팔렸으며, 국내에서도 30년간 2000만부 이상 팔린 것으로 추정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법학자이자 야당 정치인이었던 유진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등 정재계 인사들이 즐겨 읽는 소설로도 유명세를 탔다.

이 소설은 일본의 원작자와 정식 출판계약을 맺지 않은 ‘해적판’이었지만 당시에는 국내에서 법적으로 문제되지 않았다. 1970~1980년대에는 대망 뿐 아니라 ‘캔디캔디’, ‘은하영웅전설’, ‘영웅문’ 등 주로 일본, 홍콩 작품인 해외 만화·소설이 원작자 허락 없이 출판되는 일이 흔했다. 당시의 국내 저작권법은 해외 출판물을 보호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대망>은 야마오카를 찾아가 출판 허락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면서 지적재산권협정(TRIPS)이 발효되자 해외 저작물도 보호하도록 국내 저작권법이 개정됐다. 이후 야마오카의 원작은 1999년 솔 출판사가 정식계약을 맺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그런데 2005년 고씨가 야마오카나 솔 출판사와의 협의 없이 <대망> 개정판을 내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독자들에게 과거 베스트셀러로 친숙했던 이름을 다시 들고 나온 대망은 2016년까지 18쇄를 찍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12년 가량의 분쟁 끝에 솔 출판사는 고씨와 동서문화사를 저작권법 위반으로 고발해 2017년 이들을 재판에 넘겼다.

12년 동안 출판계를 들끓게 했고 3년 간의 법정 다툼으로 이어진 ‘대망 사건‘은 고씨와 출판사가 저작권법 위반 혐의를 벗는 것으로 결정났다. 1·2·3심 판결이 모두 다르다는 점이 눈에 띈다. 법정에서 쟁점이 된 것은 1975년 <대망 1권>과 2005년 <대망 1권>을 동일한 출판물로 볼 수 있는지 여부였다. 1996년 법을 개정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과거 국내 무단 출판된 저작물은 ‘회복저작물’의 지위를 얻었다. 저작권에 관한 국제협약인 베른협약의 권고를 담아 과거 해외저작물도 변경내용을 소급적용해 보호의 대상에 포함시킨 것이다. 다만 부칙으로 회복저작물을 원작물로 삼아 번역, 각색, 편집 등을 거친 결과물인 ‘2차적 저작물’에 대해선 기한 제한없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과거 출판물로 인한 법적 분쟁이 쏟아지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1975년 출간된 <대망>의 재고를 법 개정 후에도 팔 수 있었던 이유다. 이 부칙에 근거해 2005년의 <대망>이 1975년의 <대망>과 동일한 출판물이라면 저작권법을 침해하지 않았다고 볼 여지가 생긴다.

1·2심은 1975년의 대망과 2005년의 대망은 다른 작품이라고 보고 저작권법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1심은 고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1년, 출판사에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2심은 고씨와 출판사에게 각각 벌금 700만원으로 감형했다. 고씨와 출판사는 “재출간 과정에서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꾸고 바뀐 외국어 표기법을 적용했다”라고 동일성을 주장했으나 1심은 “2005년판은 새로 참여한 번역자가 1975년판에는 없었던 표현을 추가하고 새로운 표현으로 번역해 과거본과 동일성을 상실했다”고 봤다. 두 문장이었던 것을 한 문장으로 잇거나 반대의 경우 등을 예로 들었다. 2심도 동일하게 판단했으나 고씨와 출판사가 솔 출판사와 협의해 책 출간을 중단한 점, 1996년 저작권법 개정으로 피해를 입은 측면이 있는 점, 고씨가 국내 출판계에 기여한 점 등을 감안해 감형했다.

반면 대법원은 “1975년판에 등장한 독창적인 표현이 2005년판에도 포함돼 있었는지가 관건”이라며 동일성 여부를 판단하는 잣대를 다르게 봤다. 대법원은 “1975년판의 어휘와 구문의 선택 및 배열, 문장의 장단, 문체, 등장인물의 어투, 어조 및 어감의 조절 등에서 창작적인 표현들이 2005년판 대망 1권에도 상당 부분 포함돼 있다”며 “사회통념상 새로운 저작물로 볼 정도에 이르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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