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스타와 분쟁’ 일부 패소

론스타가 낸 ICC 결정문 속 문구, ‘한국 정부 부당 압력’ 근거 돼

2022.08.31 21:23 입력 2022.08.31 23:28 수정

2019년 결정문에 “금융위의 매각 승인 위해 가격 삭감 필요”

중재판정부, 한국 정부 승인 지연·가격 인하 압박으로 판단

다른 쟁점 기각…전문가 “핵심 쟁점 절반 배상, 명백한 패소”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31일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브리핑실에서 사모펀드 론스타와의 ‘투자자-국가 간 분쟁 해결 절차(ISDS)’ 판정에 대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31일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브리핑실에서 사모펀드 론스타와의 ‘투자자-국가 간 분쟁 해결 절차(ISDS)’ 판정에 대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국 정부가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와 10년간 끌어온 국제투자분쟁에서 일부 패소한 데는 론스타가 중재판정부에 증거로 제출한 론스타·하나금융지주 간 국제상공회의소(ICC) 산하 국제중재재판소 결정문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됐다. 중재판정부는 이 결정문을 바탕으로 한국 정부(금융위원회)가 론스타와 하나금융지주 간 외환은행 매각 승인을 부당하게 지연하고 가격 인하를 압박했다고 판단했다.

31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론스타와 한국 정부 간 ‘투자자-국가 간 분쟁 해결 절차(ISDS)’ 사건을 심리한 세계은행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중재판정부는 이날 한국 정부가 론스타에 2억1650만달러(약 2900억원)를 배상하라는 일부 패소 판정을 내렸다. 중재판정부가 다룬 쟁점은 크게 4가지였는데, 이 중 론스타가 주장한 핵심 쟁점 일부만 받아들인 것이다.

핵심 쟁점은 한국 정부가 외환은행 매각 승인을 두 차례 부당하게 미루는 바람에 외환은행 매각 가격이 떨어져 론스타가 손해를 입었는지 여부였다. 중재판정부는 2010년 하나금융지주와 4조6888억원에 매각을 계약했으나 한국 정부의 승인이 지연돼 2012년 3조9156억원에 팔아 손해를 입었다는 론스타 주장을 일부 받아들였다. 중재판정부는 외환은행 매각 가격이 인하될 때까지 한국 정부가 론스타와 하나금융지주 간 외환은행 매각 승인을 지연하고 가격 인하를 압박해 투자보장협정상 공정·공평대우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중재판정부의 판단에는 론스타가 증거로 제출한 ICC 결정문이 토대가 됐다. ICC 결정문에는 “하나금융지주의 (매각) 신청을 금융위원회가 승인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매각 가격 삭감이 필요하다고 하나금융지주 대표들이 론스타 대표들에게 전달했다. 그것이 당시 금융위원회의 실제 입장이었다. 김승유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가격을 깎지 못했다면 금융위의 승인을 받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증언했다”고 적혀 있다. 이 결정문은 외환은행 매각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부당한 압력’이 실제로 있었다는 판단 근거로 쓰였다. 앞서 론스타는 2016년 ICC에 하나금융지주를 상대로 “하나금융지주가 외환은행 인수 협상 과정에서 금융당국을 빙자하면서 매각 가격을 낮췄다”며 중재를 신청했다. 하나금융지주가 협상 과정에서 ‘매각가가 높으면 정부 승인을 받기 힘들다’며 자신들을 속였다는 것이다. ICC는 2019년 론스타의 청구를 전부 기각했지만 외환은행 매각 가격 인하에 금융위의 개입이 있었다는 대목은 사실로 인정했다. 그것이 중재판정부가 이날 ‘매각 승인 지연으로 손해를 봤다’는 론스타 측 주장을 받아들인 근거가 된 것이다.

한국 정부는 규정된 매각 승인 심사 기간은 권고에 불과하며, 당시 론스타의 대주주 적격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형사재판이 진행 중이어서 승인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고 반박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중재판정부는 외환은행 매각 가격 인하에는 론스타가 ‘외환카드 주가조작’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영향도 있다고 보고 론스타 측 책임을 50% 인정했다. 인하된 매각 가격의 절반인 2억1650만달러만 한국 정부가 지급해야 할 손해배상금으로 책정한 것이다.

중재판정부는 다른 쟁점에서는 대부분 한국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중재판정부는 ‘한-벨기에·룩셈부르크 투자보장협정’이 발효된 2011년 3월 이전의 정부 조치나 행위에 대해서는 관할이 없다고 봤다. 론스타가 2007년 홍콩상하이은행(HSBC)과 외환은행 매각 계약(60억1800만달러)을 맺었다가 2008년 HSBC가 인수를 포기해 손해를 입었다는 론스타의 주장 등은 판단 범위에서 제외한 것이다. 한국 정부가 부당하게 세금을 부과했다는 론스타의 주장도 “한국 정부의 과세 처분에 투자보장협정상 자의적·차별적 대우가 없다”며 기각했다. 승소할 경우 미래에 부과될 세금까지 손해배상금 액수에 추가해야 한다는 론스타의 주장에 대해서도 판정할 근거가 없다며 기각했다. 중재판정부가 손해배상액으로 인정한 금액(약 2900억원)은 론스타가 청구한 금액(약 6조3000억원)의 약 4.6%이다. 액수만 보면 한국 정부가 선방한 것으로 비치지만, 전문가들은 핵심 쟁점인 론스타와 하나금융지주 간 외환은행 매각 문제에서 한국 정부의 책임이 인정됐기 때문에 사실상 한국 정부의 패소라고 평가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 정부가 선방한 게 전혀 아니다. 핵심 쟁점이던 금융 쪽에서 50% 배상 책임이 인정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송기호 변호사는 “론스타가 손해배상으로 청구한 6조원은 이중계산된 부분, 이미 한국 법원에서 구제가 진행된 부분 등 부풀려진 액수여서 애초 전액이 인정될 수 없었다”며 “론스타가 하나금융지주에 7700억원 싸게 매각한 부분의 책임이 절반 인정됐으니 한국 정부가 명백히 패소한 것”이라고 말했다.

송 변호사는 “애초 산업자본인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는 위법한 투자로 ISDS의 보호 대상이 아니다. 한국 정부가 이 쟁점을 내세웠다면 단 한 푼도 배상하지 않는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다”면서 “당시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와 매각을 승인한 관료들이 ISDS까지 대응하면서 이해충돌로 이 쟁점이 빠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정부는 중재판정부의 일부 패소 결정으로 이자까지 더해 3100억원에 가까운 혈세를 손해배상금으로 물어주게 됐다. 이번 소송의 ‘뿌리’인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 인수부터 외환은행 매각까지 정부 정책 결정에 관여한 고위 관료들의 책임론이 불거질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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