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교사들 “솔직히 나도 문제 이해하기 어렵다”

2011.11.18 00:05 입력 2011.11.18 00:14 수정

대입 문제, 현직 교사에게 물었더니

“제가 논술 지도교사지만, 솔직히 지문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논술 지도는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셈이죠. 제대로 지도할 수 없으니 학생들이 사교육으로 가는 걸 탓할 수도 없어요.”

경향신문은 17일 연세대 수시모집 논술전형 문제(10월 시행)와 고려대 모의논술 문제(5월 시행)를 중심으로 고교 논술 담당 교사 8명에게 문제를 평가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들 교사는 한목소리로 “현재 중상위권 대학의 논술시험은 내용과 형식 면에서 공교육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본고사형 논술 금지, 영어지문 금지’ 등의 가이드라인마저 폐지해 대학들이 논술을 본고사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 논술 지도교사들도 “자신 없다”

<b>북적이는 학원</b> 대입 수시 논술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지난 11일 저녁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논술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북적이는 학원 대입 수시 논술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지난 11일 저녁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논술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올해 연세대 인문계열의 논술은 프랭크 길브레스의 ‘과학적 관리법’과 ‘도락(道樂)’에 대한 동양철학 지문 등을 제시하고 이들을 ‘낭비’의 관점에서 비교하고, 정신활동에 대한 이해방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지난 5월 실시한 고려대 모의논술 인문계열 문제는 노인인구 급증에 따른 세대갈등에 대한 지문, 효 사상과 사회적 연대, 복지 예산 등 3가지 지문을 제시한 뒤 ‘제시문 요약’ ‘제시문 사이의 관점 비교’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견해 서술’ 등 3가지 문제를 냈다. 세번째 문제는 ‘노령화지수가 (노령화지수)=(노년부양비)2을 만족하고 f(x)는 R에서의 일대일 함수라고 가정하면 (노년부양비-노령화지수) < 1/4이 되는 시점 x가 존재함을 설명하시오’였다.

논술 담당 교사 8명은 한결같이 “문제를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수도권의 한 외국어고 교사는 “연대, 고대 문제 모두 우수한 외고생들도 정상적인 학교교육만으로는 대비하기 힘들 정도로 어렵다. 지문이 모두 고교 교육과정과 동떨어져 어렵다”고 말했다. 고대부고 수학 담당 오성훈 교사는 “연세대 문제는 다면적 사고를 측정하는 문제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해결방안을 찾기 힘들어 내가 시험을 봤어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서울의 한 외고 국어 교사는 “국어 교사도, 사회 교사도 이런 문제들을 제대로 풀 수 없다”면서 “연대 인문계 문제의 경우 인지심리학과 경영학, 철학, 경제학 논리가 모두 들어갔다. 이런 문제를 통합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시스템은 고등학교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연세대 지문 (나)는 테일러리즘에 대한 경영학 이론, (라)는 초기 인식이 나중을 결정한다는 글인데 (나)를 (라)에 적용시키라는 문제는, 인문계열로 진학하는 아이들에게 경영자 마인드를 심는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비판했다.

중앙고 이현주 교사는 “제시문이 고등학생 선정 필독도서 범위를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필독도서가 동서양 고전 200여권으로 너무 많아 그런 노력도 무의미하다”고 지적했다.

교사들은 사회탐구와 과학탐구가 선택과목인 현행 교육과정상 모든 영역을 통합하거나 전 영역에서 문제를 출제하는 것도 학생들의 어려움을 더한다고 평가했다. 고대부고 안은호 교사는 “집중이수제 때문에 배우지 않은 과목도 있고, 학교별로 아예 개설되지 않은 과목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영역을 알아야 풀 수 있는 논술문제는 학교교육으로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학교 차원의 논술지도로 유명한 동북고의 권영부 교사는 “논술이 어려워진다는 것보다 점점 문제풀이식으로 가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권 교사는 “좋은 문제는 아이들의 창의력을 끌어내는 열린 문제”라면서 “2012년 연세대 창의인재트랙의 ‘2040년에 세종대왕이 외계인을 만나면 어떤 대화를 나눌까’ 같은 유형의 문제가 보편화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논술 교사들 “솔직히 나도 문제 이해하기 어렵다”

■ 어려운 논술, 교육적 효과는 있나

현재의 논술시험은 어렵기만 할 뿐 교육적 의미는 없다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현재 대학의 논술시험에는 교육적 논리가 없다”며 “고교 교육과정에 이해가 부족한 교수들이, 자신이 학부나 대학원에서 가르친 과목 중 적당히 뽑아서 출제하는 경향이 강하다. 무엇을 측정하겠다는 것인지도 애매하다”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현재의 논술이 학문 후속세대를 뽑기 위한 의미 있는 시험으로 생각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서울대에서 2008년부터 4년째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정여울씨는 현재와 같은 논술고사는 폐해가 많다고 말했다. 정씨는 “요즘 학생들은 대학원 수준 지식까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대학에 들어오는 것 같다”면서 “그러나 글쓰기를 통해 배양되는 사고력과 인문학적 소양은 삶을 통해 숙성되는 것인데, 현재와 같은 교육은 지식을 요약과 압축으로만 편하게 생각하는 경향을 만든다”고 지적했다. 그는 “상당수 대학에서 창의적 생각을 평가하기보다, 정해진 답을 맞히지 못하면 틀리는 식으로 출제해 창의적인 글쓰기나 책읽기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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