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 실태조사하라” 인권위 권고 3년간 뭉갠 문체부…취재 시작되자 “질적 조사할 것”

2023.09.18 21:23 입력 2023.09.18 21:24 수정

콘진원, 노동환경 조사한다지만

주 52시간 근무 관련 조사일 뿐

사상검증 심각성 항목마저 빠져

2020년 5월 국가인권위원회는 문화체육관광부에 “게임업계 내 여성혐오 및 차별에 대해 실태조사를 하고, 결과에 따라 해당 관행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현재 실태조사는 전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인권위는 당시 “페미니즘 관련한 글을 공유하거나 지지를 표했다는 이유로 온라인상에서 괴롭힘 및 혐오 대상이 되고 다수의 집단행동에 의해 사실상 작업 수행에 불이익을 받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며 “법령·제도·관행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문체부엔 ‘실태조사’를, 한국콘텐츠진흥원엔 ‘업체 선정 기준 개선책 마련’을 하라고 권고했다.

지난 3년간 문체부는 해당 권고를 이행하지 않았다. 게임업계 내 여성혐오와 차별에 대한 실태조사는 없었다. 문체부 산하 콘진원이 ‘게임산업 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를 벌이고 있지만 이는 “주 52시간 근무 시행으로 인한 노동환경 조사를 위해” 하는 것이다. 그나마 실태조사에 ‘게임 이용자들에 의한 종사자 사상 검증 이슈(페미니즘 등)의 심각성’을 묻는 항목이 있었지만 지난해부터는 이마저도 빠졌다. 콘진원 관계자는 “사상 검증은 양적 조사로 파악하기 힘들다고 봤다”며 “연구진이 이용자의 사상 검증 영향에 대한 설문은 이용환경 관련 내용으로 검토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의견을 냈고 삭제됐다”고 말했다.

이외에 질적 조사 등 다른 실태조사는 ‘0건’이었다. 문체부와 콘진원은 취재가 시작되자 그제야 “질적 조사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문체부 관계자는 “이달부터 종사자나 전문가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준비하겠다”며 “질적 조사를 통해 보완할 부분이 있으면 하겠다”고 말했다.

문체부는 인권위 권고 이후 지원 사업 참가 기준 등에 ‘권익 보호 규정’을 추가해 권고를 이행하려 노력했다는 입장이다. 문체부 관계자는 “게임 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 선정 기준에 ‘(종사자) 권익 보호 규정’ 항목을 넣었고, 지원 사업 참가 기준 체크리스트에 ‘혐오·차별로 인해 종사자의 권익 침해 및 불공정행위 지적·처분’을 작성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혐오나 차별로 종사자 권익이 침해됐는지 작성하도록 해도 노동자가 불이익을 우려해 알리지 않으면 수면 위로 드러날 수 없는 구조다. 실제 해당 항목은 2021년부터 생겼지만 단 한 건도 접수되지 않았다.

인권위 권고 이전 2019년 콘진원은 “게임회사는 일러스트레이터 성향 등 이유로 용역 계약 체결을 거부하거나 다른 일러스트레이터와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했다. 다만 실질적인 감독 등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인권위 진정을 주도한 김희경 전국여성노동조합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 자문위원은 “국가기관이 ‘여성혐오, 차별적인 관행이 맞다’고 인정했는데 이후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는 건 문제”라고 말했다.

정부가 손 놓고 있는 사이 노동자들은 법의 사각지대에 놓였다. 지난해 9월부터 시행된 예술인권리보장법에 따르면 예술인들도 성차별, 표현의 자유 침해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그러나 권리 침해 행위자가 국가기관 등 공공기관에 맞춰져 있어 민간기업 피해 노동자들은 대상이 아니다. 정부가 주도한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에서 개정됐기 때문이다.

대다수 게임업계 일러스트레이터는 작품당 연재 계약을 맺고 일하는 프리랜서로 노동법으로도 보호받기 어렵다. 게임업계 여성 노동자들은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자문위원은 “정부가 문제 있는 회사에 확실히 ‘페널티’를 줄 수 있는 실효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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