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작가에 게임 유저는 “페미” 낙인찍고 회사는 찍어내고…‘디지털 마녀사냥’

2023.09.18 21:23 입력 2023.09.18 21:24 수정

여성 작가에 게임 유저는 “페미” 낙인찍고 회사는 찍어내고…‘디지털 마녀사냥’

게임 ‘림버스 컴퍼니’ 유저들 “왜 여성 캐릭터 덜 벗겼나” 불만
여성 작가 SNS 털고 ‘사상검증’…회사엔 “우리가 쓴 돈 많은데”
사측 “해당 직원 계약 종료”…항의한 시민단체는 고발

지난 7월25일 남성 10여명이 경기 수원시 영통구 게임 회사 ‘프로젝트 문’을 찾았다. 이들은 모바일 게임 ‘림버스 컴퍼니’ 유저(이용자)로 “ ‘페미니스트 진영발 밈(meme·인터넷에서 모방 형태로 전파되는 문화 요소 및 유행)을 사용한’ 여성 일러스트 작가에 대해 회사가 ‘어떤 조처를 할 것인지’ 묻기 위해 모였다”고 밝혔다. 이들은 회사 앞을 찾은 ‘인증샷’을 찍어 온라인 커뮤니티에 공유하고 후기를 올렸다. 그간 남성 게임 유저들이 온라인상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비난하는 방식으로 회사를 압박하는 일은 많았지만, 여성 노동자가 일하는 본사를 직접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다행히 이날은 피해 작가가 회사에 없었다.

유저 ‘SNS 털기’, 회사 “사내 규칙 위반”

“(본인들이 저격한) 일러스트 작가와 관련해 트위터로 작성했던 특정 사상에 경도된 발언, 비하적인 발언들이 올라왔는데, 대표님과 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 궁금하다.”

유저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간담회 내용’이라며 본사 직원과 나눈 질문과 답변 전문을 올렸다. 이들은 “우리 여기 쓴 돈도 많은데 마지막 기회를 살리시는 게 낫지 않나”라고도 했다. 돈을 쓰는 소비자, 즉 자신들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는 얘기다. 이들은 “기업 가치에 매우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는 문제”라며 회사를 압박하기도 했다.

유저들이 주장하는 ‘특정 사상에 경도된 발언, 비하 발언’은 주로 불법촬영 반대 등 여성 인권에 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피해 작가가 입사하기 4년 전인 2017년 트윗, 리트윗한 기록은 물론이고 잠금 계정까지 뒤졌다. 이들이 ‘사상 검증’에 나선 계기는 모바일 게임 ‘림버스 컴퍼니’에 등장한 여성 캐릭터가 노출 없는 해녀복을 입고 등장하면서부터다. 이들은 이 캐릭터가 “별로 섹시하지 않다”며 불만을 가졌고 해당 작가 ‘색출’에 나섰는데, 작업한 사람이 남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대상을 바꿨다. 결국 게임 개발에 참여한 한 여성 작가를 찾았고 그의 SNS를 ‘털었다’.

경향신문 취재 결과 프로젝트 문은 오히려 작가에게 SNS에서 사용하는 닉네임(별명) 관리를 못한 책임을 물었다. 회사는 “사내 규칙에 대한 위반”이라고 했다. 유저들이 온라인에서 공격하고 일터까지 찾아오면서 해당 작가는 신변 위협을 느꼈지만 정작 회사는 노동자 보호에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회사는 유저들의 ‘경고’를 받아들이는듯 빠르게 입장문을 내놓았다. 26일 자정 회사는 “논란이 된 직원분과 맺은 계약은 종료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후 PM유저협회, 경기청년유니온 등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페미니즘 사상 검증에 따른 것 아니냐”는 거센 비판이 제기됐다. 프로젝트 문은 지난달 3일 다시 입장문을 내고 “논란이 된 작업자분에게 사상적인 이유를 문제 삼지 않았고, 더불어 해고 통보를 내리지 않았다”고 했다.

PM유저협회가 18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프로젝트 문’ 본사 앞에서 회사를 규탄하는 트럭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centing@kyunghyang.com

PM유저협회가 18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프로젝트 문’ 본사 앞에서 회사를 규탄하는 트럭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centing@kyunghyang.com

회사 법적 대응에 “노동자 보호” 트럭시위

사건 발생 후 50일이 지나자 회사는 프로젝트 문은 “노동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고 문제제기한 단체들에 법적 대응에 나섰다. 지난 8일 회사는 경기청년유니온과 PM유저협회 등에 “7월26일 공지 게시 전 작업자가 먼저 사직 의사를 밝혔으며, 작업자 의사와 요구를 수용해 원만하게 합의했다”면서 단체들을 고소하겠다는 내용증명을 보냈다. 회사는 지난 16일 “사실 근거 없는 과격한 비난과 허위사실 유포 등이 지속되고 있다”며 “강경하게 법적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PM유저협회는 같은 날 “소비자의 알 권리를 침해하고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시도”라고 비판했다. 김민성 PM유저협회 대표는 “김지훈 프로젝트 문 대표는 (유저들의) 사상 검증에 동조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앞으로 어떻게 노동자 보호조치를 강화할 것인지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협회는 오는 22일까지 일주일간 프로젝트 문 본사와 게임 회사가 모여 있는 판교 일대에서 트럭시위를 벌일 계획이다.

일부 회사선 여성 노동자에게만 SNS 관련 ‘동의서’ 받아
다수가 쉽게 해고 가능한 프리랜서…같은 문제 반복

입사 전 SNS 사용 관련 ‘동의서’ 받는 회사

게임 회사들이 일부 유저들의 ‘과도한 문제제기’에 휘둘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회사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입사 전 SNS 이용에 관련한 ‘동의서’를 쓰도록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초 한 게임 회사에 합격한 일러스트 작가 A씨는 근로계약서를 쓸 때 회사로부터 SNS 이용에 대한 ‘동의서’도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A씨는 “SNS상에서 (저로 인한) 문제가 발생해 회사에 피해가 가면 배상하라는 식의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7년 전 ‘SNS상의 문제’로 회사를 그만둔 경험이 있다. 2016년 김자연 성우를 지지하는 트윗을 올린 게 발단이었다. 넥슨 등 온라인게임 제작에 참여한 성우 김자연씨는 ‘여성들은 왕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티셔츠를 입고 자신의 SNS에 인증샷을 올렸다가 유저들이 반발하는 바람에 하차했다. 회사는 A씨에게 해당 트윗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진 면담에서 회사 측은 그에게 “일베냐, 메갈이냐” “고객층이 일베면 (우리도) 일베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해 A씨는 미련 없이 게임업계를 떠났다.

그러나 오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A씨는 여성을 주체로 한 게임을 개발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다시 현장에 돌아왔다. 게임업계는 하나도 변한 게 없다는 듯 함께 입사한 남성 일러스트 작가에게는 SNS 이용을 제재하는 내용이 담긴 동의서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회사가 비겁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아예 해외로 떠나는 작가들도 있다. 2018년 한 작가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여자 아이돌 글을 SNS에 공유했다는 이유로 게임 유저들에게 온라인상에서 공격당했다. 게임 회사 X.D 글로벌은 해당 작가에게 “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트윗을 해달라”고 요청했고, 작가가 거절하자 회사는 그의 그림을 삭제하고 일을 못하게 했다. 현재 이 작가는 일본에서 활동 중이다. 김환민 IT노조 부위원장은 “실력 있는 일러스트 작가들이 ‘페미니즘 사상검증’을 이유로 회사로부터 보호받지 못해 삶의 터전을 옮기는 상황은 회사는 물론이고 게임업계 전체에 손해”라고 말했다.

“일부 남성들의 목소리가 과대대표”

전국여성노동조합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이하 디콘지회)에 따르면 김자연 성우에 대한 지지가 이어졌던 2016년 이후 현재까지 ‘페미니즘 사상검증’으로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는 디지털 창작 노동자들의 신고 건수가 43건에 이른다. 이 중 14건은 최근 프로젝트 문 사건 이후 디콘지회가 별도로 받은 것이다. ‘부당한 처우’는 해고나 업무 배제, SNS 삭제 압박 등을 말한다. 프로젝트 문에서 만화작가로 일한 20대 B씨는 “회사가 노동자를 ‘부품’처럼 보는 것이 문제”라면서 “회사가 유저들의 요구를 받아주니까 마치 게임을 하듯 ‘디지털 마녀사냥’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일부 남성들의 목소리가 업계 내부에서 과대대표되는 것이 문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2년 게임이용자 실태조사’를 보면 여성의 게임 이용률은 73.4%로 남성(75.3%)과 큰 차이가 없다. 게임 회사 쿠키런과 웹툰 쪽에서 일한 만화 작가 C씨는 “(회사는) 면접 과정에서 제가 이력서에 적지도 않은 SNS를 찾아 페미니즘 관련 글을 올린 것을 언급하며 ‘문제가 터지면 책임질 거냐’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게임은 물론이고 웹툰, 웹소설 소비자 중 여성도 많은데 일부 남성들 목소리가 너무 과대대표되고 있다”며 “마치 여성을 지워버리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2년 게임산업 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를 보면 게임업계 종사자는 남성이 여성보다 2배 이상 많다. 이 같은 구조에서 남성 소비자를 주로 의식하다보니 여성 캐릭터는 선정적으로 그려진다. C씨는 “남성향(남성수용자에게 초점을 둔) 작품에서 여성의 몸이 굉장히 적나라하게 묘사되는데도 제대로 걸러지지 않고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수위가 너무 관대하다”고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업계 내부에 여성 성상품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한 것이 문제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이번 프로젝트 문 사건도 핵심은 ‘왜 여성의 옷을 많이 벗기지 않았느냐’ 아닌가”라며 “여성을 성상품화하고 남성의 오락거리로 삼는 데 문제의식이 없다”고 말했다. 게임물관리위원회는 선정성, 폭력성, 사행성 등 7가지를 따져 등급을 분류한다. 이에 따르면 지난해 등급 부적정으로 시정을 요청한 오픈마켓 게임물(구글이나 카카오 등 오픈마켓을 통해 배포·판매할 수 있는 게임물)은 1만8560건으로, 2021년(1만4270건) 대비 30.1% 증가했다.

여성 작가에 게임 유저는 “페미” 낙인찍고 회사는 찍어내고…‘디지털 마녀사냥’ 이미지 크게 보기

“여성 노동자들이 직면한 문제”

계속되는 게임 유저들의 ‘SNS 뒤지기’, 게임업계의 ‘사상검증’ 사건들은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과 직결된다. 디지털 콘텐츠 창작 노동자들은 대부분 ‘프리랜서’이다보니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도 어렵다. 디콘지회가 2020년 ‘디지털 콘텐츠 창작노동자들의 노동실태와 보호방안’에 대해 설문조사(응답자 285명)한 결과를 보면 10명 중 6명(66.6%)은 작품당 연재 계약을 맺고 작업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이어 한시적 계약(15%), 개인사업자 작업(7%) 등이었다. 근로계약을 맺는 경우는 5.9%에 그쳤다.

김유리 디콘지회 조직국장은 “디지털 창작 노동자들은 회사가 언제든지 쉽게 해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취약한 위치에 놓여 있다”면서 “국회나 정부 어디에서도 제동을 걸지 않고 회사들도 ‘유저들의 권리’라며 이를 방치하면서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