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눌러왔던 성폭력 고통, 후대까지 대물림…“국가치유센터가 적극 나서야”

2024.05.31 06:00 입력 2024.05.31 10:22 수정

⑤ 남은 이들의 상처, 우리의 숙제

자식들 영문 모른 채 학대·방치

사실 안 이후 동정·원망 동시에

“피해자 존중·연결되는 경험 필요”

트라우마치유센터 2곳, 기반·인력 확충해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이다감 상담전문가(왼쪽)와 윤경회 팀장이 지난달 28일 전남대학교 김남주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 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이다감 상담전문가(왼쪽)와 윤경회 팀장이 지난달 28일 전남대학교 김남주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 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5·18민주화운동 당시 벌어진 성폭력은 피해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치유되지 않은 고통의 기억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르며 자녀 세대로 대물림되는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조사위 분석 결과를 보면 아이를 낳은 피해자들은 자녀를 학대·방치하거나, 자녀와 소통을 원활하게 하지 못하는 문제를 겪었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분석한 이다감 상담전문가는 “대부분 자신의 피해 사실을 자녀에게 털어놓지 못했고 자녀는 영문도 모른 채 성장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며 “자녀들이 성인이 된 후 엄마의 피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안타까움과 원망스러움이라는 양가감정을 겪는 이유”라고 했다.

이 상담가는 이들의 후유증, 사회적 관계 단절 등 복합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충분한 애도 기회와 피해자 개인의 처지에 맞춘 치유 방법을 제공하고, ‘국립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 내 성폭력 상담 전문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5·18 민주화운동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한빛고등학교 학생들이 임을위한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5·18 민주화운동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한빛고등학교 학생들이 임을위한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한 번도 목놓아 울어본 적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상담가는 “먼저 오랫동안 침묵했던 시간을 마음껏 애도하게 하고, 국가가 책임있는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하는 게 회복의 첫걸음”이라고 했다. 개인의 상황도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이야기할 안전한 공간이나 대상을 원하는 피해자가 있고, 반대로 아예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피해자가 있다. 개인·집단 상담, 자조 모임, 약물 치료, 경제적 도움 등 지원 방식은 사람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성폭력 피해자’라는 낙인이 사라지도록 지역 커뮤니티에서 인식을 바꾸는 작업도 필요하다. 이 상담가는 “피해자를 탓하는 과거의 가부장적 통념은 이들을 사회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는데, 5·18 민주화운동 단체를 비롯해 지역 커뮤니티에서 이들이 존중받고 연결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여러 지원을 통해 피해자가 사회로 한발짝 나아가면, 다른 가족들의 고통도 서서히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는 7월 광주 본원·제주 분원 개소를 앞둔 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가 구심점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5·18민주화운동, 부마민주항쟁, 여수·순천 10·19 사건 등 국가폭력 피해자는 150만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그중에서 현재 광주·제주트라우마센터에 등록해 방문하는 인원은 3000명도 안 된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피해자를 보듬기엔 현실적 제약도 크다. 차호준 국립 국가폭력 트라우마 치유센터 원장은 “현재 2개 센터 인력을 합쳐 20여명에 불과해 장기적으로 이를 두 배로 늘리고 상담가들이 직접 피해자를 찾아가는 방식을 고려하고 있다”며 “지역 의대나 해바라기센터 등과 협약을 맺고 상담을 지원하는 방법도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성폭력 사건에 대한 상담 인력을 육성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이 상담가는 “기존 센터 상담가들이 PTSD 전문가이지만 성폭력 전문가는 아닌 경우도 있어 일부 한계가 있다”며 “PTSD와 성폭력 문제, 피해자들이 말할 수 없었던 사회의 가부장적 통념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전문가를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시에 위치한 국립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 본원 전경. 행정안전부 제공

광주시에 위치한 국립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 본원 전경. 행정안전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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