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숙 병상인터뷰 “309일의 싸움, 매일매일 기적 같았다”

2011.12.17 11:52 입력 2011.12.17 11:56 수정
부산 | 백철 주간경향 기자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온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2010년 12월 한진중공업 사측은 노동자들에게 400명 규모의 정리해고 및 희망퇴직 계획을 통보했다. 올해 1월 6일 새벽,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51)은 홀로 한진중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6월 11일부터 4차례의 희망버스가 영도조선소를 방문했다. 노사 합의가 성사된 11월 10일, 김 지도위원은 크레인을 내려왔다. 309일 만이다.

김진숙. 그가 85호 크레인 고공농성을 마치고 지상으로 내려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사측은 김 지도위원이 크레인에서 내려온 직후 오작동의 우려 등을 이유로 85호 크레인을 철거했다. 김 지도위원은 8월 초에 발행된 <주간경향> 938호의 표지를 장식했다. 당시 김 지도위원과는 전화를 통해 인터뷰가 이뤄졌다.

14일 부산 시내의 한 병원에서 김 지도위원을 만났다. 그의 겉모습은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다. 허옇게 센 머리는 검게 염색을 했다. 오랫동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도 될 정도로 편안해 보였다. 김 지도위원은 “머리를 염색하고 나니까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알아본다. 목욕탕에 갔더니 옆에 있던 아주머니들이 ‘한진중공업 크레인에 올라갔던 김진숙이 아이가?’ 하면서 알아보더라”고 말했다.

부산의 한 병원에 입원한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14일 자신을 찾아온 문안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 백철 기자

부산의 한 병원에 입원한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14일 자신을 찾아온 문안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 백철 기자

멀쩡한 겉과 달리 김 지도위원의 속은 그리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목과 허리의 디스크 증세로 오랫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김 지도위원은 309일간의 장기농성으로 원래 좋지 않았던 몸상태가 드러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자와 만난 다음날에는 장기적인 치료를 위해 부산의 한 재활병원으로 병상을 옮겼다.

병실은 기자에 앞서 김 지도위원을 만나러 온 손님들로 북적였다. 단병호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이사장(전 민주노동당 의원), 이종래 한국노동연구소 부소장과 오랫동안 85호 크레인을 지켜온 ‘크레인 폐인’들이 김 지도위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세상과 연결시켜준 트위터가 큰 힘

김 지도위원의 건강상태를 시작으로 이들의 대화 화두는 자연스레 트위터와 희망버스로 이어졌다. 김 지도위원에게 있어 트위터는 세상과 자신을 연결시켜주는 끈이었다. 크레인에서 내려올 무렵 언론 인터뷰에서 “2003년 김주익에게 트위터가 있었다면 살아 내려올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말했을 정도로, 트친(트위터 친구)들의 존재는 그에게 큰 힘이 됐다.

“트위터를 통해 이런 저런 친구들을 많이 알게 됐어요. 사실 크레인에 오르기 전까지는 다 모르던 친구들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분들이 매일 크레인을 찾아와 저를 위해 기도도 해주시고 같이 있어주시고 해서 너무 고맙죠.”

3만명에 달하는 김진숙의 ‘트친’들은 그의 좋은 말동무였다. 뿐만 아니라 트친들은 한진중공업 해고자들에게 쌀·김치·커피 등 필요한 물건도 보내주고, 십시일반으로 투쟁기금을 모아줬다. 김 지도위원은 6월 온건파 노조 지도부의 ‘노사 합의’가 있었을 때 트위터의 위력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노사 합의안이 6월에 나왔을 때 ‘이제 나 혼자 싸워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노사가 합의한 이후 투쟁은 대체로 외롭게 진행되죠. 조중동은 한진중공업 문제가 끝났다고 하고, 기자들은 노사가 합의를 했는데 왜 안 내려오냐고 묻더라고요. 당시 집행부의 합의가 조합원들을 외면한 일방적 결정이었다는 점을 설명하려면 한진중공업 노조의 역사부터 해서 길게 말해야 되는데 저로선 굉장한 부담이었죠.”

“그런데 그걸 트위터가 대신하더라고요. 저로선 그게 기적이었거든요. 제가 하고 싶었던 말들, 노사 합의를 왜 받아들여선 안 되는지, 당시 집행부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트위터 친구들이 다 얘기해주는 덕에 어떻게 보면 굉장히 편하게 싸웠죠.”

11월 10일 309일 만에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온 김진숙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 서성일 기자

11월 10일 309일 만에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온 김진숙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 서성일 기자

그는 309일간의 싸움이 “매일매일 기적 같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1차 희망버스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투쟁은 ‘외로운 싸움’이었다.

“사실 1차 희망버스 전에는 크레인에 처음 올라갔을 때나 기자들이 찾았지, 부산지역 신문 말고는 오지도 않았어요. 100일째 되는 날 <경향신문>하고 <한겨레>와 인터뷰한 게 다였죠. 그때만 해도 ‘이렇게 나도 잊혀지나보다. 김주익이 이래서 죽었구나’라는 생각이 날마다 들었어요.”

희망버스가 5차례나 이어지고 사회적 영향력이 커지자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들은 ‘절망버스’를 타고 희망버스를 저지하러 부산에 내려왔다. 보수언론은 연일 김 지도위원과 희망버스를 비판하는 기사와 사설을 썼다.

“조중동, 어버이연합과 같은 수구세력들에게 희망버스는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죠. 그쪽 사람들이 민주노총 같은 조직 노동운동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알죠. 집회를 언제 하고, 몇 명이 모이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예상이 되잖아요. 그런데 희망버스는 저도 예측이 불가능했고, 수구세력들도 이게 어떻게 진행될지 몰라 크게 긴장을 했던 거죠.”

“다시 크레인에 오르고 싶지 않다”

조남호 한진중공업홀딩스 회장을 지난 8월 국회 청문회장으로 불러낸 것 역시 희망버스의 성과였다. 당시 청문회에서 정동영 민주당 의원은 김 지도위원이 나온 영상물을 튼 뒤 청문회장에 김 지도위원과의 전화통화를 생중계하려 했다. 하지만 “쇼하지 말라”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성토로 생중계는 이뤄지지 않았다.

“조남호 청문회 때 정동영 의원을 통해서 전화 연결을 했죠. 전화 너머로 한나라당 의원들이 고함을 지르는 것이 다 들렸는데 뭘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어요. 내가 범법자여서 전화를 하면 안 된다는데, 그러면 왜 나를 국회로 불러들이려 했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그때는 좀 무서웠어요.”

국회 청문회 이후 한진중공업 노조 지회장 선거에서 ‘민주후보’가 압도적으로 당선됐다. 이후 노사는 해고자 94명에 대한 ‘1년 내 재고용’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김 지도위원은 “이제 희망버스가 쌍용차 노동자들을 향해 갔으면 좋겠는데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마다 크레인 농성을 할 수는 없다. 그 역시 “다시 크레인에 오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결국 정치의 차원에서 풀어야 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지금처럼 해왔던 일들을 앞으로 계속 해나가겠다”고 답했다.

“주변에 저보고 내년 총선에 출마하라는 분들이 의외로 많아요. 저는 항상 정색을 하면서 아니라고 하죠. 저는 우리가 이미 진보정당을 통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한계를 겪었다고 생각해요. 몇몇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죠. 노동자들의 전체적인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 진정한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라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을 앞으로 계속 해나갈 겁니다”

노조 지회장 선거에서 과반수 득표로 당선된 차해도 지회장(52)은 “김진숙 지도위원이 없었다면 투쟁이 실패하고, 비해고자들에 대한 2차, 3차 정리해고가 계속됐을 수도 있다. 희망버스처럼 시민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싸움이 진행돼야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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