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일, 식당일, 가스 검침원, 건물 청소일 점철된 27년

2013.05.29 06:00 입력 2013.05.30 22:45 수정
특별취재팀

1부 (8) ‘나쁜 일자리’의 굴레

쉼 없이 달려온 마흔일곱 전미숙씨의 ‘일자리 전전기’

전미숙씨(가명). 올해로 47세이다. 그는 두 아이 낳을 때, 그리고 몸이 아파 힘들었을 때 몇 년을 제외하면 일을 쉬어본 적이 없다. 공장노동자, 백화점 판매원, 식당일, 보험설계사, 도시가스 검침, 청소 등 시쳇말로 살면서 ‘안 해본 게 없다’. 노동용어로 치면 상용직, 무급가족종사자, 일일근로, 특수고용직, 기간제근로, 용역근로까지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고용형태를 겪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로 남편의 작은 공장이 부도나면서 그의 삶은 ‘비정규직의 바다’에 내팽개쳐졌다. 삶이 팍팍해지고 일자리를 구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일자리만 얻을 수 있어도 다행이었다. 노동의 질은 갈수록 악화됐다. 그가 거쳐온 일자리는 밤낮없이 장시간 해야 하는 일이었고, 육체적으로 고된 일이었다. 그는 “참 고단하게 살았다.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이라고 말했다.

지난 14일 오전 서울시내 한 대학교에서 청소노동자 전미숙씨가 계단 청소를 하고 있다.<br />전씨는 지난 27년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공장일과 식당일, 가스검침원, 청소일 등을 전전해 왔다. | 박민규 기자 parkyu@kyunghyang.com

지난 14일 오전 서울시내 한 대학교에서 청소노동자 전미숙씨가 계단 청소를 하고 있다.
전씨는 지난 27년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공장일과 식당일, 가스검침원, 청소일 등을 전전해 왔다. | 박민규 기자 parkyu@kyunghyang.com

■ 그나마 여공 시절이 유일한 호사

미숙씨는 1986년 충청도 한 소도시의 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여성의 고교 진학률은 85%, 대학 진학률은 30% 수준이었다. 미숙씨는 진학 대신 취업을 택했다. 졸업 직전 미숙씨는 서울 구로공단에 있는 삼성물산 공장에서 견습생으로 미싱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졸업 뒤에는 경기도 광주의 연사공장에 정식으로 취업했다. 원단을 짜기 전 실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2교대로 일하면서 한 달에 12만원을 받았다. 당시 금 한 돈이 2만원 정도였다. 미싱일보다는 급여가 좋은 편이었다. 6월 항쟁에 이은 노동자 대투쟁의 여파로 1988년부터는 급여도 조금씩 올랐다. 1989년 같은 공장에 다니던 남편과 결혼했다. 그해 첫아이를 낳고 일을 그만뒀다. 이 일이 미숙씨의 처음이자 마지막 정규직 일자리였다.

1990년 미숙씨의 남편은 그동안 배운 기술과 모아둔 돈으로 공장을 차렸다. 직원 24명이 주야교대로 일하는 공장이었다. 미숙씨는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을 챙겨주고 집안 정리를 마친 뒤 아이를 들쳐업고 공장에 가서 다른 직원들처럼 일했다. 그러는 동안 둘째도 낳았다. 미숙씨는 그 시기를 두고 “집안일을 하면서 공장일을 도왔다”고 표현했다. 미숙씨처럼 함께 사는 가족의 사업장에서 보수를 받지 않으면서 가족 사업체의 수입을 높이는 데 기여한 노동자는 ‘무급가족종사자’로 분류된다. 무급가족종사자는 경제활동인구에도 포함된다. 미숙씨가 남편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던 1990년에는 한국 여성 취업자 중 미숙씨와 같은 무급가족종사자가 24.5%에 달했다. 이후 무급가족종사자 비율은 지속적으로 줄어 2012년에는 10.7%까지 떨어졌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쳤다. 미숙씨 남편의 공장도 직격탄을 맞았다. 빚더미에 앉은 채로 공장 문을 닫았다. 공장을 정리하고 남은 빚이 8000만원 정도 됐다. 남편은 다행히 공장을 인수한 사람에게 고용돼서 공장 관리일을 시작했다. 경기가 나아지면서 남편의 급여는 월 300만원 가까이 됐지만 빚을 갚기엔 역부족이었다. 둘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미숙씨는 다시 일터로 나갔다. 외환위기 비정규직이 늘어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미숙씨의 ‘저임금 비정규직’ 전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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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매원에 식당일, 황소처럼 일했지만

단순작업을 반복하는 공장일이 미숙씨가 가진 경력의 전부였다. 막상 재취업을 하려니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직업교육을 받아 취업할 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럴 시간도 없었고, 교육이수 후 취업한다고 해도 바로 구할 수 있는 일용직과 급여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침 아이 친구 엄마가 백화점 매대에서 옷을 파는 일거리를 소개해줬다. 일당은 3만5000원. 당시 최저임금을 겨우 넘기는 수준이었지만 귀한 돈이었다. 근로계약을 맺지 않고 일거리가 생겼을 때 며칠 혹은 몇 주씩 일하는 ‘일일근로’ 형태였다.

판매일은 생각보다 고됐다. 오전 9시30분에 출근하면 점심 1시간과 휴식 30분을 빼고 퇴근시간인 오후 8시까지 줄곧 서 있어야 했다. 백화점 감시카메라가 일터를 계속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잠깐 앉아서 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미숙씨는 둘째아이를 낳을 때 걸린 임신중독증 때문에 몸이 극도로 나빠져 있는 상태였다. 하루종일 서 있다 보면 다리가 붓다 못해 마비가 와서 계단을 올라가지 못할 정도가 됐다. 몸 때문에 결국 6개월 만에 일을 그만뒀다. 어차피 일용직이어서 그만두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몸이 힘들다고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다시 일자리를 찾았다. 이번에는 식당일이었다. 2004년부터 동네에 새로 문을 연 고깃집에서 음식을 날랐다. 4대보험도 되지 않는 일자리였다. 처음에는 하루 7시간 정도만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몇 달이 지나자 식당 주인은 미숙씨에게 하루 12시간 풀타임으로 일을 해달라고 했다. 한 푼이 아쉬워 그렇게 하기로 했다.

식당일은 박봉이었다. 하루 7시간 근무할 때는 월 70만원, 하루 12시간 근무할 때는 월 125만원을 받았다. 턱없이 적은 월급이었지만 미숙씨는 그나마 자신은 돈을 많이 받은 편이었다고 말했다. “내가 일은 황소처럼 잘했다”고 미숙씨는 말했다.

하지만 또다시 몸이 버티지 못했다. 식당일 역시 몸을 많이 써야 하는 노동이었다. 하루종일 서서 무거운 쟁반을 나르다가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근육통에 시달렸다. 나중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해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아침밥도 챙겨주지 못할 정도가 됐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식당일도 1년 만에 접었다.

■ 노동자 취급도 못 받는 특수고용직

2005년, 백화점 일자리를 소개한 아이 친구 엄마가 보험일을 소개해줬다. 한 화재보험사에 보험설계사로 들어갔다. 보험설계사는 흔히 ‘특수고용직’이라 부르는 특수형태근로 종사자다. 회사 대 노동자로 근로계약을 맺는 게 아니라 회사 대 개인사업체로 계약을 맺고 성과에 따라 수당이 배분되는 구조다. 학습지 교사, 레미콘 기사 등이 대표적인 특수고용직이다.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고, 4대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퇴직금도 없다.

보험을 시작했다고 하자 처음에는 지인들이 너도나도 보험에 가입해줘 어느 정도 수당을 챙겼다. 영업에도 자신이 붙었다. 한창 때는 월 400만원까지 번 적도 있다. 하지만 잘 버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사업자의 신분인 만큼 재투자가 필요했다. 수입의 절반 가까이는 영업비로 나갔다. 설상가상으로 미숙씨가 보험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미숙씨는 그때부터 가장이 됐다.

미숙씨는 2008년 보험설계사를 그만뒀다. 고객이자 친한 친구의 보험금 지급 문제로 친구와 사이가 틀어진 뒤 지인을 상대로 영업을 해야 하는 보험일에 회의를 느껴서다. 4년을 일했지만 물론 퇴직금은 없었다.

■ 다시 계약직으로

새로 구한 일자리는 도시가스 검침원이었다. 6개월씩 고용계약을 갱신하는 기간제근로였다. 마감 기일만 맞추면 프리랜서처럼 원할 때 일할 수 있다는 친구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쉽지 않았다.

하루에 1000여가구를 방문해 가스 검침을 했다. 아파트를 돌아다닐 때는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수 없어 계단으로 뛰어다니고,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주택을 돌아다녔다. 검침보다 더 어려운 건 가스 점검이었다. 고객의 집에 방문해 도시가스 누출 등을 점검하는 기간에는 부재 중인 집을 다시 방문하느라 같은 집을 수십 번씩 돌아다니곤 했다. 나중에는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힘들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 처음 들은 것과 다르게 하루에 짧게는 4~5시간, 길게는 10시간까지 일을 했다. 남자 혼자 있는 집에 방문해야 할 때는 무섭기도 했다. 그런데도 월급은 100만원 남짓에 불과했다. 적은 임금이었지만 혼자 몸으로 아이들을 건사해야 하는 처지에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2년 동안 도시가스 검침원 일을 하다 지인에게 학교 청소일을 소개받았다. 출근시간이 빠르지만 노동조합이 있어서 근로조건이 괜찮다는 말을 듣고 2010년 청소일을 시작해 지금까지 하고 있다. 청소일은 대체로 용역업체에 고용돼 이 업체의 지휘하에 다른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용역근로’ 형태다. 고용된 용역업체와 일하는 사업장이 계약을 해지하면 자동으로 해고되는 불안정한 신분이다. 다행히 미숙씨는 노조가 조직된 뒤 들어와서 해고 걱정은 거의 안 해봤다.

미숙씨는 새벽 6시 이전에 출근해 건물 3개 층의 복도와 계단, 강의실, 교수 연구실을 하루종일 청소하고 오후 4시에 퇴근한다. 대청소라도 하면 연장근무는 기본이다. 월급은 120만원 정도 된다. 새벽 일찍 출근해 하루종일 청소를 하는 게 힘들지만 오전 청소가 끝나면 잠시 쉴 시간이 있어서 할 만하다. 집과 학교가 가까워서 교통비가 들지 않는 것도 장점이다. 지금까지 했던 일 중에서는 가장 낫다고 미숙씨는 생각한다. 건강은 여전히 좋지 않다.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다. 하지만 그만두면 당장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꾸역꾸역 일터로 나간다.

같은 시대 여성들과 비슷한 교육수준을 갖췄음에도 미숙씨의 삶은 상용직, 무급가족종사자, 일일근로, 특수고용직, 기간제근로, 용역근로까지 한국 사회의 모든 고용형태가 망라돼 있다. 미숙씨에게는 일자리의 선택폭이 거의 없었다. 2013년 3월 현재 여성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율은 40.5%로 남성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율인 26%를 크게 앞선다. 일자리의 질이 낮다보니 임금도 적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우리나라 남녀 임금 격차는 39%로 OECD 국가 중 가장 크다.

■ 특별취재팀 전병역(산업부)·김재중(정책사회부)·남지원(사회부)·이혜인(전국사회부)·이재덕(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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