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는 남자의 책임’이라는 가부장적 논리, 여성 해고 등에 악용

2013.05.29 06:00 입력 2013.05.29 06:09 수정
특별취재팀

여성 일자리가 열악한 이유

최근 종영한 드라마 <직장의 신>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를 다뤘다. 무대는 특정 기업 마케팅부. 같은 상사의 지휘를 받고 비슷한 일을 하지만 11명 중 6명은 정규직이고, 5명은 비정규직이다.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은 이름 대신 ‘언니’로 불리며 하대당한다. 계약 연장 시기 때는 잘릴까 불안해한다. 임금도 정규직보다 크게 낮다.

드라마에 나오는 비정규직 5명은 모두 ‘여성’이다. 우연일까. 2013년 3월 통계청 통계를 보면 비정규직 비율은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높다. 한국의 임금근로자 1774만여명 중 남성(1012만여명)의 정규직 비율은 74%에 달한다. 하지만 여성(761만여명)의 정규직 비율은 59.5%에 불과하다. 임금수준도 여성이 남성보다 낮다. 여자의 월 평균 임금은 150만원으로 남자 평균 임금인 256만원의 58.5% 수준이다. 왜 남성보다 여성의 고용형태가 더 불안정하고 임금 수준이 낮을까.

■ 여성은 생계 부양자가 아니다?

‘가정 내 생계 책임자는 남성이라는 인식’은 종종 여성 해고를 정당화하는 사례로 활용된다.

사례를 보자. 1997년 외환위기 때 농협은 구조조정을 하면서 사내부부 사원을 명예퇴직 대상자로 삼았다. 부부 중 여사원들은 “명예퇴직을 하지 않으면 남편을 순환명령 휴직시킬 것이며, 순환명령 휴직자는 2차 구조조정 때 정리해고 1순위가 될 것”이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 결과 사내부부 752쌍 중 92%인 688명의 여성 노동자가 사직했다. 사내부부 부당해고를 무효화해달라는 소송에서 농협은 “아직까지는 남편이 가정의 경제를 부담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김영 부산대 교수(사회학)는 “여성이 가정 내에서 가계를 부양하지 않는 ‘피부양자’라는 인식은 기업이 여성을 좋은 일자리에 고용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시킨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성의 벌이는 남성보다 덜 중요하다는 기존 인식과 달리 비정규직 여성 중 대다수는 가정 내에서 실제적 가장 역할을 맡고 있다. 2004년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에서 전국 비정규직 여성 277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26.6%가 ‘가구 소득(벌이)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2년차 장애인 활동보조인인 박현진씨(46·가명)는 가장으로서 생계를 담당하고 있는 경우다. 박씨는 하루에 7시간씩 초등학교 6학년인 시각장애 아동을 돌본다. 급여는 월 70만원. 이 일로는 생계를 꾸릴 수 없어 오전에는 다른 아르바이트를 한다. 식당 서빙, 목욕탕 카운터 보기, 반찬 만들기 등 때에 따라 생기는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며 박씨는 60만원을 더 번다. 이렇게 해서 박씨가 한 달에 버는 돈은 총 130만원 정도다. 대학생 두 자녀를 둔 박씨는 “내가 가장이라서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고 말했다. 박씨의 남편은 기자재 납품사업을 하다가 8년 전 일을 접은 뒤 현재까지 별다른 수입원 없이 지내는 상태다.

[왜 지금 ‘여성 일자리’인가]‘생계는 남자의 책임’이라는 가부장적 논리, 여성 해고 등에 악용

■ 여성이 하는 일은 기술 수준이 낮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기술 수준과 숙련도가 낮은 일이나 힘이 덜 드는 일을 한다는 인식이 남녀의 임금 차이로 나타난다. 같은 일을 해도 여성의 임금수준이 더 낮다.

경기도 안산의 한 공장 생산라인에서 불량부품 검사를 하는 김영희씨(48·가명)는 주 6일, 하루에 12시간씩 일한다. 시간당 최저임금으로 계산해 받는 한 달 임금은 150만~170만원 사이다. 김씨와 완전히 똑같은 일은 하는 남성 노동자들은 김씨보다 시급이 높아 월 급여를 20만원가량 더 받는다.

부품검사가 아닌 프레스 찍는 일 등은 주로 남자가 맡는다. 힘과 기술이 더 필요해 남자가 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김씨는 “프레스 찍는 일은 주로 남자들이, 제품 불량 검사는 여자들이 맡는데 프레스 찍는 일이 더 힘드니까 돈을 더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남녀의 임금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여성이 주로 속해 있는 직종의 임금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교육·보건·숙박 서비스업에 많이 종사한다. 돌봄서비스 직종의 여성 비율은 의료·복지 서비스직 93%, 가사·육아 도우미 98.5%, 사회복지 전문직 85.9%로 매우 높다.

돌봄서비스 직종의 급여 수준은 가사·육아 도우미의 경우 월 평균 76만6000원, 의료·복지 서비스직은 87만6000원, 사회복지 전문직은 127만7000원(2010년 통계청 자료 기준)으로 아주 낮은 수준이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사회학)는 “시장은 합리적으로 임금을 책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남녀의 직무에 대한 평가가 반영돼 있다”고 말한다. 돌봄은 집에서 엄마(여자)가 흔히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전문적인 일이라는 인식이 없고, 힘이 덜 드는 일이라 생각돼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 주변부로 밀려난 여성

여성이 본격적으로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한 1990년대 초부터 여성 노동자의 60% 이상이 임시·일용직 형태로 일했다. 당시 남성은 60% 이상이 상용직 형태로 일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전체 임금노동자 중 남성(1012만여명)이 여성(761만여명)보다 많다.

하지만 파견근로자 수는 여성이 남성보다 1.12배, 가내근로자 수는 5.9배, 특수고용직 종사자 수는 1.91배 많다. 이 같은 간접고용 방식의 노동은 고용이 불안정하고 여성들이 성희롱, 저임금, 성차별 등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이게 한다.

2006년 KTX 여승무원들의 업무가 외주화된 것, 1998년 파견법 제정 시 비서·우편 사무원·보모·간병인 등 여성이 많은 직종이 파견 허용대상으로 선정된 것 등은 여성이 주변부 일자리로 밀려나간 예다. 김 교수는 “가사와 육아를 남성이 담당하도록 끌어오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성의 일은 남성에 비해 보조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근로감독 기능의 강화를 통해 여성 고용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조순경 이화여대 교수(여성학)는 저서 <노동의 유연화와 가부장제>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적 고용이 고용형태에 의해 비가시화되고 있으나 현재의 근로감독 기능으로는 직접적인 차별에 대한 규제조차 어렵다”고 말한다. 조 교수는 고용차별을 감독할 수 있는 근로감독관의 수가 적은 것, 불법파견에 대한 감독이나 행정적 조치가 없어 간접고용으로 인해 차별받는 여성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 특별취재팀 전병역(산업부)·김재중(정책사회부)·남지원(사회부)·이혜인(전국사회부)·이재덕(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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