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출’ 언니가 준 금서 한 권”…어린 시다의 삶을 바꿨다

2020.01.01 21:57 입력 2020.01.01 22:24 수정

봉제 노동자 이숙희·강명자씨가 본 ‘전태일 열사 50주기’

15~16세의 어린 나이에 서울의 봉제공장에서 ‘시다’ 일을 시작했던 이숙희 전태일재단 교육위원장(왼쪽)과 강명자씨. 전태일의 죽음 이후 노동운동에 눈을 뜬 이들은 정권의 탄압에도 노조활동을 이어갔고, 이후에도 40년 이상 ‘미싱사’로 일하며 현장을 지켰다.  권호욱 선임기자

15~16세의 어린 나이에 서울의 봉제공장에서 ‘시다’ 일을 시작했던 이숙희 전태일재단 교육위원장(왼쪽)과 강명자씨. 전태일의 죽음 이후 노동운동에 눈을 뜬 이들은 정권의 탄압에도 노조활동을 이어갔고, 이후에도 40년 이상 ‘미싱사’로 일하며 현장을 지켰다. 권호욱 선임기자

“언니는 왜 이런 걸 나한테 줬어?”

입술이 다 부르튼 스물한 살의 강명자씨는 문제의 책을 건네준 ‘학출’(학생운동권출신공장노동자) 언니를 붙들고 따졌다. 아마도 1983년의 일이다. 책 제목은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당시엔 금서였다.

언니를 닦달한 것은 금서를 줘서가 아니라, 책을 읽은 후 마음이 어수선해져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불이 꺼진 구로공단 기숙사에서 강씨는 창밖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었다. 자꾸 눈물이 나서 입술이 다 부르텄다. 다음날 기숙사에선 아침밥으로 수프를 줬는데 차마 입에 댈 수 없었다. 누구는 차비를 털어서 ‘시다들’ 풀빵을 사줬다는데, 수프마저도 사치 같았다. 시다 시절을 거친 현역 미싱사 강씨에게 책 속 재단사의 기행은 사무치게 다가왔다. 그다음 날은 더 심했다. ‘나는 이 사람처럼 살 수 있나, 나는 뭘 해야 하지’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즈음 공장에서는 ‘빨갱이’들이나 한다는 노동조합 설립 얘기가 오갔다. 강씨는 “책을 읽고 나서는 노조 설립을 놓고 고민하거나 뒤로 물러서거나 이런 게 없어졌다”며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 노조는 이듬해 한국 최초의 연대파업인 ‘구로동맹파업’의 중추가 된다.

누구든 읽은 사람의 심신을 뒤흔들어 놓는 이 책은 훗날 제 이름을 찾는데, 바로 <전태일 평전>이다. 보기에 따라서 이 책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전태일은 숨을 거두기 3개월 전 일기에 “나는 돌아가야 한다.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라고 썼다. 강씨는 “여성노동자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2020년은 전태일이 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노동자에게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며 몸에 불을 붙인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전태일이 ‘나를 다 바치고’ 난 후, 그와 일면식도 없는 여공들은 노조를 만들었다. 비록 그 노조는 다 깨졌고, 근로기준법은 지금도 준수되고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을 향해 사람의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전태일식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는 셈이다.

◆“다 주고 간 전태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일깨워줬다”

“‘학출’ 언니가 준 금서 한 권”…어린 시다의 삶을 바꿨다

“그러나 참으로 전태일은 죽었는가? 천만에 전태일은 죽지 않았다.”

<전태일 평전>의 서문에서 조영래 변호사는 단언했다. 그럴 까닭은 충분했다. 전태일이 산화하고 일주일 만에 청주 여공 50명이 체불임금 청산을 요구하며 노동청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2주일 뒤에는 조선호텔의 노동자 이삼찬이 노동조합을 만들려다 해고되자 분신을 시도했다. 의정부에서는 노조활동 방해에 항의해 21명의 노동자가 분신을 기도하기도 했다. 하나같이 당시로선 전례 없는 일들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은 몸에 불을 붙이는 과격성 때문이 아니라,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특수했다. 어찌나 충격이 컸던지 조선일보조차 그해 12월 사설에서 “지금의 전반적인 노동환경은 매우 한심스러운 것이고 산업재해는 빈도와 규모가 늘어가고 있으며, 분배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은 커져가고 있는 것”이라며 “종래의 노동정책도 일대 전환을 해야겠다”고 썼다.

그러나 충격은 늘 그렇듯 빨리 가셨다. 그 결과, 50년이 지난 지금도 산업재해로 매년 2000명이 목숨을 잃고, 분배에 대한 노동자의 불만은 여전히 크다. 그렇다면 이제 전태일은 참으로 죽었을까. 전태일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여전히 “전태일은 죽지 않았다”고 말했다.

■ 시다에서 노동자로

이숙희씨(67)는 1969년 열여섯의 나이로 평화시장에서 ‘시다’ 일을 시작했다. 한 달에 이틀의 휴일을 빼고는 하루 15시간을 일하고 월급 2700원을 받았다. 당시 쌀 한 가마니가 5000원(현재 21만4000원), 청자 담배 한 갑이 100원(현재 4500원)이었으니 오늘날 돈으로는 11만~12만원꼴이다. 지독한 장시간·저임금 노동이었다.

그 시장의 복판에서 전태일은 시다와 여공의 ‘인간답게 살 권리’를 주장하며 산화했지만, 정작 이씨는 그 죽음을 몰랐다. 사장은 여공들의 동요를 우려했는지 “깡패가 취업이 안되니까 일하기 싫어서 죽었다”고만 했다.

그러나 전태일은 기어코 이씨에게 파고들었다. 전태일의 유지를 잇는 청계피복노조는 야유회를 구실로 이씨와 안면을 텄다. 그들은 전태일이 했던 것처럼 ‘하루 8시간 노동’이 명시된 근로기준법을 꺼내들고 장시간·저임금 노동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 곁에서 이씨는 전태일이 남긴 일기를 봤다. “왜 가장 청순하고 때 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 묻고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라는 전태일의 반문은 울림이 컸다. 이씨는 그제야 너무나도 긴 노동시간과 사장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공임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씨는 “죽을 때까지 배불리 먹어보지 못한 사람인데 자기 자신이 아니라 알지도 못하는 남을 위해서 다 바친 사람이 있느냐”며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이씨와는 근 10년의 터울을 두고 시다 일을 시작한 강명자씨(58)에게도 전태일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열다섯 살부터 봉제공장 시다로 일을 시작한 강씨는 1982년 구로공단의 대기업 ‘대우어패럴’에 취업했다.

전태일이 떠나고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노동환경은 여전히 변변치 않았다. 통상 작업은 오전 8시에 시작해 오후 7시면 끝났지만,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면 철야를 밥 먹듯이 해야 했다. 물량이 폭주하는 시기 철야에 들어가면, 평화시장 여공들이 그랬듯 잠 깨는 약 ‘타이밍’을 먹었다. 그래도 잠이 오면 ‘노루발’이라 불리는 미싱 바늘에 제 손가락을 찔러 잠을 쫓기도 했다.

그 엄혹한 노동의 한복판에서 강씨는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읽었다. 강씨는 “눈물이 나서 읽을 수가 없었다. 기숙사 사감 발소리 피해가면서 날을 새웠다”며 “우리들 문제 가지고 이렇게까지… 나는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싶었다”고 했다.

■ 노동자에서 투쟁가로

“‘학출’ 언니가 준 금서 한 권”…어린 시다의 삶을 바꿨다

뒤늦게 전태일을 만난 두 여공은 노동운동의 선두에 나섰다. 이씨는 1970년대 중반 청계피복노조 간부를 맡았다. 그 시절 노조는 시다 월급을 미싱사가 아닌 사장이 주도록 하는 ‘시다 임금 직불제’를 관철시켰다. 완전히 실현되진 않았지만 밤샘 농성 끝에 사주들로부터 작업시간 단축을 약속받기도 했다. 1977년 인근 노동자들의 배움터로 쓰인 청계피복노조의 ‘노동교실’이 당국에 의해 폐쇄되자, 이씨는 전태일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와 함께 사수 투쟁을 벌이다 구속되기도 했다.

강씨 역시 10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1984년 6월 1200명 규모의 대우어패럴 노조가 설립되고 강씨는 사무장을 맡았다. 그러나 독재정권은 노동운동을 산업발전의 걸림돌로만 여겼다. 1985년 6월 몇차례 경찰 조사를 받았던 강씨는 여느 날처럼 조사를 받으러 출두했다가 바로 수감됐다. 강씨 등 노조 간부 3인의 구속에 항의해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파업을 시작했다. 경찰과 사측의 대대적 탄압이 시작되자 파업은 구로공단 내 다른 기업인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노동자의 파업으로까지 번졌다. 단일 사업장의 범위를 넘는 대규모 파업은 한국에선 이때가 처음이었다. 강씨의 동료들을 포함해 43명이 구속되고 1500여명이 대량해고됐다.

복역 후에도 강씨는 노동자이자 활동가로 살았다. 직후 취업했던 삼성물산 하청 와이셔츠 공장은 점심도 주지 않고 일을 시켰다. 강씨는 동료들과 준법투쟁을 조직했다. 회사는 점심을 제공하고 식당을 마련하는 대신 강씨를 해고했다. 이후 강씨는 구로공단의 어떤 공장에도 취업할 수 없었다. 강씨는 “면접 퇴짜 맞고 수출의 다리 위에서 엄청 울었다”면서 “그때는 구로공단에 ‘블랙리스트’가 돼서 못 갔는데 지금은 쇼핑몰이 돼서 돈 없어서 못간다”며 웃었다.

■ 다시 생활인으로

그 후 이들은 한동안 생활인으로 살아왔다. 강씨는 지난달 20일까지도 소규모 봉제공장에서 객공으로 일했다. 객공은 특정 사업장에 소속돼 있지 않은 임시직으로 생산 수량에 따라 노임을 받는다. 강씨의 마지막 출근날 업주는 “내일은 일이 없으니 나오지 말라”고만 했다. 한때는 대기업도 운영할 정도로 규모가 컸던 봉제공장은 이제는 다 해외로 떠났다. 사업주를 포함해도 5명이 될까 말까 한 소규모 공장들이 골목 구석구석에 작은 사무실을 차리고 하청의 재하청, 재재하청으로 일거리를 받아 연명하고 있다. 사업장 규모가 5명도 채 안되다보니 여전히 근로기준법은 적용되지 않고 4대보험도 없다.

강씨가 최근 알아본 일자리는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7시에 끝나고 일당은 8만원을 줬다. 주6일에 점심시간은 40분에 불과했다. 사장은 특별히 화·목·금 3일은 연장근무를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저녁을 늦게 먹어야 하는 게 싫어 거절했다. 강씨는 “‘공순이’라고만 안 하지 지금도 노동환경은 똑같다”며 “오늘 일하다가도 내일 일 없으면 ‘나오지 마세요’ 카카오톡 한 줄 딱 보내는데 그 심정 아느냐”고 했다.

2000년대 말까지 미싱일을 해왔던 이씨는 현재 전태일재단 교육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청소년들에게 전태일을 알리는 삶을 살고 있다. 자녀들도 이들이 얼마나 뜨거운 삶을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결혼 후 이들은 평범한 생활인으로 각자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나 가슴속의 전태일은 틈 날 때마다 이들의 발길을 끈다. 두 사람은 지난달 7일 석탄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의 추모식인 ‘전태일부터 김용균까지’ 거리행진에 참석했다.

이들은 전태일이 오늘날에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씨는 “어린 시다의 생활을 가슴 아파한 죽음이 있고, 세월이 변했는데도 기업은 손해도 아니고 단지 이윤이 줄어드는 걸 못 견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씨는 “예전엔 하나의 희망이 보이고 싸워야 할 대상도 뚜렷이 그려졌다면 지금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 현실이 참 암담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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