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④‘찍퇴’와 ‘사축’이 말한다]윗사람 지시대로 굴러가는 부속품…“나는 사람이 아니무니다”

2016.01.19 06:00 입력 2016.02.02 18:40 수정

길고 긴 노동시간 …“나는 일개미”

한국 특유 수직 문화…“나는 소”

언제든 대체 가능…“나는 애완견”

대기업 직장인 오모씨(30)는 닭이다. 황금알을 낳길 강요받고 끊임없이 알을 낳는다. 보통 무정란을 낳고, 때때로 쌍란을 낳기도 한다. 꾸준히 황금알을 낳는 동료는 가장 큰 스트레스의 원인이다.

중소기업 직장인 김모씨(25)는 길고양이다. 사람들 눈치 보는 게 주된 일이다. 팀원들이 다가오면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지다 걸린 길고양이처럼 도망가고만 싶다.

일러스트 | 김번 작가 이미지 크게 보기

일러스트 | 김번 작가

돌고래, 원숭이, 경주마, 소, 일개미, 고양이…. ‘사축(社畜)’을 자처한 청년 직장인들은 스스로를 동물에 빗댔다. 이들은 재주를 부리고, 앞만 보고 달리며, 걱실걱실 주어진 일을 처리한다. ‘가축처럼 회사에 길들여진 직장인’을 뜻하는 사축이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고 있다. 취업이라는 좁은 문을 열고 들어간 청년들은 저녁이 없는 긴 노동시간과 적은 보상, 수직적인 사내 문화 앞에서 “이족보행(二足步行·서서 걷는 인간을 뜻하는 은어)”을 포기했다.

■ “여왕개미는 언제 퇴근할까…”

‘일개미’ 김모씨(32)는 매일 오후 5시가 되면 눈치를 보게 된다. 팀장의 안색과 시계의 분침을 번갈아 살핀다. 그의 직장은 업무를 1시간 일찍 시작해 1시간 빨리 마치는 ‘8-5 근무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출근에 대해서만 강제력이 있다. 퇴근은 ‘부득이할 경우 오후 5시에 이뤄질 수도 있다’고 권고하는 데 그친다. 실제로 오후 5시에 퇴근하면 곧잘 “일이 없느냐”는 팀장의 지청구를 듣는다. 김씨는 약속이 있어도 오후 7시까지는 자리를 지킨다.

상사 눈치를 보느라 밤늦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보면 ‘기러기아빠’들에게 붙들리기 일쑤다. 선배들은 술을 마시지 않고는 밤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처럼 매일 술을 마셨다. 개인 술상대보다 더 힘든 건 회식이었다. 김씨의 주량은 소주 반병이지만, 회식 때는 2~3병도 따라 마셨다. 중간에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가 게워내곤 했다.

야근과 술에 치이며 직장은 ‘개미굴’이 됐다. 어떤 일을 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는 없지만 여왕개미가 시키는 일은 뭐든지 군말 없이 해내야 한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글로벌 기업에 취업했다는 자부심은 6년간의 직장생활 동안 산산이 부서졌다. 신입사원 합숙 연수에서 했던 카드 섹션과 율동 영상을 명절에 모인 일가친척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던 일은 곱씹을 때마다 이불을 차게 만든다. “열심히 하면 나중에 임원이 될 수도 있으니 참으라”는 말이 최상의 격려였다. 김씨는 임원 명단에 이름 올리는 꿈을 접고, 주말마다 토익 스피킹 책을 뒤적거리며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

축생이 된 청년 직장인은 김씨처럼 긴 노동시간에 절망한다.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2014년 기준 2057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상위다. 영국 경제학자 그레고리 클라크는 중세 농노의 노동시간을 1620시간으로 추산했다. 한국인의 평균 노동시간이 1000년 전의 농노보다 훨씬 많은 셈이다.

스스로 ‘사축’이라고 부르는 이모씨(27)는 “업무량이 많아 야근이나 주말 출근은 물론이고 쉬는 시간까지 시달린다”며 “개그 프로에서 본 것처럼 ‘사람이 아니무니다’라고 외치고픈 심정”이라고 말했다.

■ “있으나마나인데 왜 뽑았니?”

‘코뚜레에 메인 소’ 이모씨(31)는 첫 직장에서 스스로를 “조직생활에 안 맞는 사람”이라고 진단했다. 6개월의 ‘허니문’이 끝난 후로는 혼나기에 바빴다. 주말을 앞두고 팀장은 “쉬면서 한번 봐”라며 서류철을 건넸다. 이씨는 말 그대로 쉬면서 서류를 봤지만 돌아온 월요일, 팀장은 서류 내용을 꼬치꼬치 물었다. 답변하지 못한 이씨에게 팀장은 “진짜 쉬면서 봤느냐”며 역정을 냈다. 그때부터 팀장은 이씨를 “야”라고 불렀다.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든 걸 대비할 수는 없었다. 팀장과 함께 외근을 나간 날, 이씨는 주차비로 낼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혼났다. 그 다음날에는 1000원권을 준비해 외근을 나갔지만 공영 주차장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질책을 들었다. 자신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일할 기회를 준 데 감사하며 첫 월급으로 사장 선물도 샀던 그는 한 해가 지나기도 전 사표를 만지작거렸다. 선배들은 틈날 때마다 지침을 내렸다. “메일이든 카카오톡이든 확인했으면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해라” “전화받을 때는 친절한 톤과 초등학생 톤을 구분해라” “인사할 때는 감정을 티내지 마라”. 이씨의 일거수일투족엔 첨삭이 붙었다. 이씨는 열심히 자신을 교정했지만 팀장은 “네가 하면 문제 생길 수 있다”며 중요한 일은 두고 부수적인 일만 맡겼다. 이씨는 18개월 만에 첫 직장을 그만뒀다.

유독 청년세대가 사축을 자처하는 데는 노동시간 못잖게 한국 기업 특유의 문화가 영향을 미쳤다. 청년 직장인의 퇴사 경험을 연구한 책 <사표의 이유>를 쓴 이영롱씨는 “청년세대는 기성세대가 짜놓은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직장 문화와 불화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소하게는 점심 식사 고르는 것부터 퇴근 눈치 보기, 강제적 회식, 문제 제기하면 질타받고 능력보다는 연줄과 사내 정치가 앞서는 것”을 예로 들며 “합리성과 부당함에 대한 감각을 가진 청년세대가 보기에 직장은 수직적이고 꽉 막힌 곳”이라고 말했다. 그 결과 최근의 ‘헬조선’ 담론에서도 직장 문화의 ‘미개함’은 빠지지 않는다.

■ “너 없어도 회사는 돌아간다”

인격의 모멸감을 견뎌 얻을 수 있는 사회적·경제적 대가가 적다는 점도 ‘젊은 사축’들의 신세 한탄을 돋운다. 최모씨(29)는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연봉은 동결되거나 물가상승률을 못 따라간다”며 “돈을 모을 수 없으니 2년 전 입사할 때나 지금이나 미래는 백지 상태”라고 말했다. 그나마도 사축이 발 딛고 선 직장은 불안정하다. ‘평생직장’이란 말은 옛말이 됐고 고용불안정은 일상이 됐다.

‘애완견’ 김모씨(30)는 자신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얼마 전 김씨의 상사들은 한 명씩 차례로 3개월간 무급휴가를 받았다. 사장은 “좋은 제도”라고 했지만 선정 기준도 없었다. 무급휴가는 반강제적으로 이뤄졌다. 한 상사는 가족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무급휴가 중 퇴직금 일부를 정산해 매달 자신의 계좌에 입금했다. 상사들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아무 일 없이 돌아갔다. 김씨는 “너희가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 같았다”며 “누구라도 찍어낼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0일 한국노동연구원은 지난해 8월 기준 임금근로자로 신규채용(근속기간 3개월 미만)된 15~29세 청년의 64%가 비정규직이라고 밝혔다. 2009년의 54%보다 10%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일자리의 질이 점점 떨어지고 있지만, 직원을 ‘사축’처럼 부리려 드는 회사를 견디지 못하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 사람을 키우기보다 대체 가능한 기계나 부속품으로 본다는 절망 때문이다. 이영롱씨는 “회사가 나를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것을 청년 직장인들은 너무나 잘 안다”며 “일자리가 더 이상 사회적 안전망으로 기능하지 못한단 사실을 깨달아버린 청년들은 취업해도 불안하고, 사표를 품고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박재현 송윤경 이혜리 이효상 정대연 김서영 김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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