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닉 가는 아이들, 가감 없이 알려주는 어른들…성에 세대차는 없다

2019.09.27 06:00 입력 2019.10.21 16:11 수정

유스클리닉에서 제공하고 있는 ‘게이 맵’. 파트너를 만날 수 있는 장소, 이슈, 이벤트 등 성소수자들을 위한 다양한 정보가 담겨있다.

유스클리닉에서 제공하고 있는 ‘게이 맵’. 파트너를 만날 수 있는 장소, 이슈, 이벤트 등 성소수자들을 위한 다양한 정보가 담겨있다.

스웨덴 전역에 280개 유스클리닉
만 23세 이하면 누구나 무료 이용
신체 궁금증·문제 생겼을 때 방문
집 근처에 있는 ‘성 주치의’인 셈

60년 성교육 역사 중심엔 RFSU
10대 가이드북·성감대 지도 등
사실적이면서 친근한 자료 발간
학교·교사 지원…캠페인도 진행

할아버지도 성교육 받은 스웨덴
반감없이 성관계 하는 법 가르쳐
“아이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에
자세히 알려주는 게 어른의 의무”

공교육을 중심으로 한 스웨덴의 성교육 시스템은 학교 밖에서도 성 자문단체, 의료기관, 언론 등 여러 사회 주체들과 네트워크를 이룬다는 점에서 더욱 견고해 보인다. 이토록 잘 짜여진 성 교육망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학교 성교육 역사만 60년이 넘는 만큼 그 뿌리가 깊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20~30년대 스웨덴 내부에서 민주주의와 현대화에 대한 열망이 들끓던 시기였다. 전쟁 이후 사회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며 평등이 중요한 국가적 가치로 떠올랐고 이를 바탕으로 학교 교육에서 성교육을 의무화해야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누릴 수 있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사회개혁의 바람이 스웨덴에만 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독일과 덴마크, 네덜란드 역시 비슷한 시기를 거쳤지만 스웨덴이 다른 점이 있다면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결혼제도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공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30년 전에도 이미 스톡홀름에는 결혼제도에 묶이지 않은 채 아이를 낳고 사는 커플들이 많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별, 계층 간의 차별은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교육 분야가 아닌 사회개혁 분야에서, 시작부터 ‘평등’의 가치를 포함한 성교육 시스템의 기반이 다져진 것이다. ‘남녀칠세부동석’을 미덕으로 여겼던 유교 사상 속에서 성평등 의식이 쉽게 싹트지 못한 한국과는 ‘씨앗’이 뿌리 내린 토양부터가 달랐던 셈이다.

■청소년 ‘성 주치의’ 유스클리닉

유스클리닉(Ungdomsmottagning)은 스웨덴 청소년의 성 건강을 위한 실질적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간호사와 전문상담사, 조산사, 의사 등 의료진이 상주하며 성 건강과 관련된 진단과 상담, 경증 질병 치료, 타 의료기관으로의 연계를 돕는다. 1970년 스웨덴 달라나 지역에 첫 개원을 한 이후로 현재 전국에 280개가 운영되고 있으며 만 23세 이하는 누구나 무료로 이용이 가능하다.

스웨덴의 10대들은 보통 사춘기와 신체 변화가 시작되는 13세 전후로 클리닉을 방문하기 시작한다. 집과 가까운 클리닉을 정해놓고 다니거나 다른 여러 군데의 클리닉을 이용할 수도 있다. 신체에 관한 실질적 문제나 학교에서 해결되지 못한 궁금증이 생겼을 때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주치의’인 셈이다. 유스클리닉은 지역사회와 밀착해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정의나 보건소와 비슷해 보이지만 담당하는 분야가 ‘성 건강’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맨 처음 개원 당시에는 학교 보건의 연장선에서 학교 간호사를 보충해주는 성 자문 기관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스톡홀름 스쿨 유스클리닉(SKUM)의 요아킴 간호사가 자신의 진료실에서 유스클리닉의 역할과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스톡홀름 스쿨 유스클리닉(SKUM)의 요아킴 간호사가 자신의 진료실에서 유스클리닉의 역할과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스클리닉에서 무료 제공하는 다양한 종류의 콘돔들. 각 제품의 특성(맛, 향기, 촉감, 크기 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 내원자들은 자신에게 맞는 콘돔을 선택할 수 있다.

유스클리닉에서 무료 제공하는 다양한 종류의 콘돔들. 각 제품의 특성(맛, 향기, 촉감, 크기 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 내원자들은 자신에게 맞는 콘돔을 선택할 수 있다.

스톡홀름 스쿨 유스클리닉(SKUM·Stockholms Skolors ungdomsmottagning)에서 조산사로 근무하는 수잔 해밀턴은 유스클리닉을 “학생들이 자유롭게 찾아와 자신의 몸과 감정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성 정체성과 국적, 종교, 장애 여부 등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누구나 환영받는다”라고도 덧붙였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방문한 스톡홀름 유스클리닉은 그의 말대로 밝고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이 눈에 띄었고 누구나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도록 다양한 종류의 콘돔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이곳에는 4명의 조산사와 각각 1명의 간호사와 심리학자, 2명의 청소년 전문 상담가 등 총 12명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클리닉을 찾은 학생들의 질문은 아주 작은 것들부터 시작된다. 내원자들은 “몸에서 독특한 냄새가 나요” “특정 부위가 가려워요” “내가 정상일까요?” 등의 작은 고민을 안고 클리닉을 방문한다. 신체 변화에 동반되는 심리적 우울이나 불안도 이곳을 찾는 이유가 된다. 자살징후, 알코올중독, 마약중독, 심각한 학대상태일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원자들의 정보나 상담 내용은 철저한 비밀보장을 원칙으로 한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교사나 간호사에게 물어보기 힘든 것들에 대해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유스클리닉은 구체적인 피임법 상담과 임신테스트, 성병 검사, 성폭행 사후 조치, 낙태 연계 등에도 관여한다. 내원자들은 간단한 산부인과·비뇨기과 진료를 통해 진단과 처방도 받을 수 있다. 성과 관련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의료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큰 위안이 된다.

밝은 분위기의 유스클리닉 진료실. 곳곳에 성교육 캠패인 자료와 콘돔이 배치되어 있다.

밝은 분위기의 유스클리닉 진료실. 곳곳에 성교육 캠패인 자료와 콘돔이 배치되어 있다.

유스클리닉 진료실에 구비되어 있는 진료대. 알록달록한 무지개 색깔의 담요가 밝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내원자들은 이곳에서 간단한 의료 진단과 치료, 처방을 받을 수 있다.

유스클리닉 진료실에 구비되어 있는 진료대. 알록달록한 무지개 색깔의 담요가 밝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내원자들은 이곳에서 간단한 의료 진단과 치료, 처방을 받을 수 있다.

간호사 요아킴이 안내한 진료실에는 한국에서 일명 ‘굴욕의자’로 불리는 산부인과 진료대가 구비돼 있었다. 어두운 가림막이나 커튼 대신 알록달록한 무지개 담요가 깔린 진료대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산부인과 진료실의 이미지와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요아킴씨는 스웨덴 청소년들에게 유스클리닉을 방문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이라고 했다. 스톡홀름에는 총 9개의 유스클리닉 있는데 이 클리닉에만 지난해 내원횟수가 1만 건에 달한다.

그는 “어느 사회건 청소년들이 보호받고 있고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며 “더 많은 아이들이 클리닉에 오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스케줄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평일 중 하루는 저녁 늦게까지 운영하고 토요일에도 문을 연다. 요아킴이 “어떤 아이는 학교가 끝나고 오고 싶을 수도 있고 어떤 아이들은 부모님이 집에 없을 때 오고 싶어 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교사가 학생들을 데리고 유스클리닉을 찾기도 한다. 학교 보건 시스템을 비롯해 성 자문 기관, 유스클리닉 협회 등과 협력하며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점에서 견고하게 연결된 스웨덴의 성교육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른은 답변할 의무가 있다”

‘꽃길’만 걸었을 것 같은 스웨덴의 성교육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1938년까지는 콘돔 사용 교육을 하는 것이 불법이었다. 사용과 판매는 가능했지만 광고는 금지되어 있었다. 동성애 차별의 역사도 깊다. 1608년 동성애를 금지하는 법이 제정된 이후 1944년 공식적으로 동성애 처벌법을 없앴지만 스웨덴 정부는 1979년까지 동성애를 질병으로 분류했다.

성교육과 성평등을 외쳐 온 스웨덴의 사회단체들은 오늘날 ‘성교육 선진국 스웨덴’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3년 교사 출신 사회운동가 오타르(Ottar)가 설립한 스웨덴 성교육협회(RFSU·Riksforbundet for sexuell upplysning)와 1950년대 동성애 혐오에 반대해 조직된 시민단체 성평등 연합(RFSL·Riksforbundet for homosexuellas, bisexuellas, transpersoners och queeras rattigheter)이 대표적이다.

스웨덴 성교육협회(RFSU)의 한스 올손 성교육 자문위원이 스톡홀름 RFSU 사무실에서 그간 발간된 성교육 캠페인 자료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스웨덴 성교육협회(RFSU)의 한스 올손 성교육 자문위원이 스톡홀름 RFSU 사무실에서 그간 발간된 성교육 캠페인 자료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스톡홀름 중심부 쇠데르말름에 위치한 RFSU 사무실은 스웨덴 성교육의 역사와 함께한 RFSU의 발자취를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쪽 벽면에 전시된 포스터와 인쇄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RFSU에서 발간된 교육 자료와 잡지, 캠페인 홍보물들이었다.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에코백에 시선이 멈췄다. RFSU 성교육 자문위원 한스 올손씨가 “스웨덴의 인기 패션 브랜드와 협업해 만든 에코백”이라며 얼마 전 있었던 스톡홀름 뮤직 페스티벌을 기념해 제작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MY PUSSY MY CHOICE’라는 문구가 적힌 이 에코백이 페스티벌에서 얼마나 큰 인기를 끌었는지에 대해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RFSU는 스웨덴의 성교육 시스템 전반에 걸쳐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성 건강과 권리에 대한 정보 및 교육을 제공하는 자문 기관으로서, 성교육 자료를 직접 개발해 학교와 교사를 지원하고 시민사회와 밀접한 다양한 캠페인을 진행한다. 성 권리와 연관된 특정 정책에 지지를 표명하거나 압력을 행사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큰 목소리를 낸다. 성범죄자 처벌과 자유로운 낙태를 위한 권리 증진은 ‘내 몸의 권리를 위해 싸우자(Fighting For Body Right)’라는 슬로건을 내건 RFSU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문제다. 운영비의 상당 부분은 피임기구와 자위기구 판매를 통해 얻는다. 자체수익을 통한 운영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라 외부의 입김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스웨덴 성교육협회(RFSU)의 한스 올손 자문위원이 RFSU에서 발간한 성교육책을 펼쳐보이고 있다.

스웨덴 성교육협회(RFSU)의 한스 올손 자문위원이 RFSU에서 발간한 성교육책을 펼쳐보이고 있다.

RFSU에서 개발·제작한  성교육 교구와 자료들. 청소년들을 위한 성교육 가이드북을 비롯해, 교사 성교육 교본, ‘성감대 지도’를 영상으로 만든 DVD ,‘3D 클리토리스 모형’ 등 다양하다.

RFSU에서 개발·제작한 성교육 교구와 자료들. 청소년들을 위한 성교육 가이드북을 비롯해, 교사 성교육 교본, ‘성감대 지도’를 영상으로 만든 DVD ,‘3D 클리토리스 모형’ 등 다양하다.

올손 자문위원이 테이블 위에 최근 그동안 발간된 성교육 자료들을 펼쳤다. 표지에 ‘섹스, 너만의 방식’이라고 적힌 10대 성교육 가이드북을 비롯해, 유튜브를 활용한 성교육 수업법을 담은 교사 성교육 교본, ‘성감대 지도’를 영상자료 만든 ‘Sex on the Map’ 등 사실적이면서도 친근한 이미지들로 채워진 자료들은 딱딱한 교과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중 그가 “최근에 업데이트되지 못한 예전 버전”이라며 미안한 표정으로 건넨 두 권의 책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우리말로 하면 ‘성기 사전’ 정도로 해석이 가능한 ‘Pussypedia’, ‘Dicktionary’라는 제목이 붙은 두 가이드북 안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성기 사진들을 비롯해 성관계 시 세밀한 조직들의 반응, 자위, 관련 질병과 검진 방법 등 ‘성기에 대한 모든 것’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올손씨는 “가장 중요한 것은 ‘실질적이면서도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추상적이거나 은유적인 표현은 성교육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성관계 시 파트너를 만족시키는 방법을 궁금해하는 청소년에게는 신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민감하지, 성감대에 대해 자세히 교육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는 “어른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가 성관계를 했을 경우 일어날 수 있는 리스크를 강조하는 것”이라며 긍정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고 현실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성관계 잘하는 법’을 가르치는 스웨덴식 성교육은, 수업시간에 자위에 대해 가르쳤다고 학부모들로부터 ‘민원’이 빗발치는 보수적인 한국의 교육 현실에서 다소 파격적으로 들린다. 이와 같은 갈등은 없을까? “스웨덴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도 성교육과 성 평등 교육을 받은 세대입니다. 학부모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은 아이들에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성 정보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회 전반적으로 세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성교육에 대한 세대 차이가 크게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어진 그의 조언은 의외로 간단했다.

“스웨덴에서도 맨 처음 학교에서 성교육을 시작했던 1950년대에는 ‘얼마나 자세히 알려줘야 하는가’를 두고 혼란과 우려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찾은 답은 아이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에 답을 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아이가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 궁금해한다면 아이가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을 정도로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알려 주면 됩니다. 어른들이 그에 대해 정확한 답을 줄 의무가 있습니다.”

▶관련기사

[성교육, 이젠 젠더교육이다]남녀 ‘몸 사용법’부터 피임은 물론 육아 복지정책까지…평생 배운다

[성교육, 이젠 젠더교육이다]스웨덴엔 초등학생 위한 50년 된 ‘성 칼럼’ 있다

■ 특별취재팀: 노정연·임소정·김찬호·최민지(모바일팀), 이보라(사회부) 기자

■ 취재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

<스톡홀름 | 글·사진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