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계란의 피라미드’를 깨다

2020.01.04 06:00 입력 2020.01.04 08:12 수정

고은과의 ‘미투 소송’에서 승리한 최영미 시인

시인 최영미의 삶은 ‘미투 이전’과 ‘미투 이후’로 나뉜다. 글쟁이로 살아온 그는 출판사들이 자신의 시집 출간을 꺼리자 회사를 차렸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드나들던 머리에/ 계산서와 어음과 물류창고를 집어넣고”(‘사업자등록’) 주문을 알리는 팩스 소리로 아침을 연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시인 최영미의 삶은 ‘미투 이전’과 ‘미투 이후’로 나뉜다. 글쟁이로 살아온 그는 출판사들이 자신의 시집 출간을 꺼리자 회사를 차렸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드나들던 머리에/ 계산서와 어음과 물류창고를 집어넣고”(‘사업자등록’) 주문을 알리는 팩스 소리로 아침을 연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대한민국 법원에서 보낸 소장을 받고/ 나는 피고 5가 되었다// 두터운 종이에 쪽수도 매겨 있지 않았다/ 이걸 내가 왜 읽어야 하지?// 한 편의 짧은 시를 쓰고,/ 100쪽의 글을 읽어야 하다니// 아름답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문장들/ 쉼표도 찍히지 않은,/ 골치 아픈/ 적대감으로 가득하나 마지막은 ‘합니다’/ 정중하게 끝을 맺은/ 독이 묻은 종이를 읽고 싶지 않아/ 내가 아끼는 원목가구를 더럽힌다는 게 분했지만,/ 서랍장 위에 원고와 피고 5를 내려놓고//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밥부터 먹어야겠다.”(‘독이 묻은 종이’)

2018년 7월 말. 시인 최영미(59)는 치과에 다녀왔다. 1년에 한 번 스케일링을 받는 날이었다. 치과에선 ‘잇몸이 안 좋다며 당장 수술하라’고 했다. 최영미는 나중에 하겠다며 돌아섰다. 귀가해 쉬고 있을 때, 현관 벨이 울렸다. 법원에서 보낸 소장이었다. ‘오늘 잇몸수술 안 받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툼한 서류 봉투를 뜯고 몇 장을 대충 훑어봤다. 더 읽고 싶지 않았다. 가장 아끼는 원목 서랍장 위에 소장을 두었다. 손해배상 청구액은 1000만원. 모욕감을 느꼈다. 내가 가난하다고 1000만원만? 갑자기 배가 고파왔다. 근처 음식점에 가서 냉면을 먹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문단 성추행 폭로한 ‘괴물’ 발표
고은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
상고 포기로 최 시인 승소 확정

문학계 주류의 침묵 속에서
‘대시인’에 맞선 외로운 싸움
긴 터널을 빠져나온 그는
새해 소회를 짧은 시로 대신했다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한 편의 짧은 시 ‘괴물’은 최영미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최영미의 ‘미투’에 고은은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으로 대응했다.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내리는 ‘대시인’은 권력이었다. 문단 주류는 침묵했다. 일부는 고은을 엄호했다.

계란(최영미)으로 바위(고은)를 친 것인가, 라는 탄식이 나왔다. 최영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내 명예가 그의 명예보다/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슨무슨 상을 받지 않았지만,/ 무슨무슨 상 후보로도 오르지 않은// 계란으로/ 바위를 친 게 아니라,/ 바위로 계란을 깨뜨린 거지// 우상을 숭배하는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썩은 계란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피라미드를/ 흔든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었지”(‘바위로 계란 깨기’)

최영미가 옳았다. 법원은 1·2심 모두 최영미의 증언에 신빙성이 있다며 그의 손을 들어줬다. 고은이 상고를 포기하며 지난해 12월3일 최영미의 승소가 확정됐다. 12월27일, 서울 동교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긴 터널을 빠져나와 새해를 맞는 소회를 물었다. 시를 들려줬다. “길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다만 이 햇살 아래/ 오래 서 있고 싶다”(‘1월의 공원’ 중에서)

◆“En선생이 권력이니까…그를 키운 문단권력, 쉽게 변했을까요”

최영미 시인이 지난해 12월27일 서울 동교동의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고은 시인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최종 승소한 그는 이제 다시 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 2020년, 시집 <돼지들에게> 개정증보판과 새로운 산문집을 펴낼 예정이다.  김창길 기자

최영미 시인이 지난해 12월27일 서울 동교동의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고은 시인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최종 승소한 그는 이제 다시 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 2020년, 시집 <돼지들에게> 개정증보판과 새로운 산문집을 펴낼 예정이다. 김창길 기자

# 자존심 있지…‘E’를 붙이다

‘괴물’ 탈고 후 “매장당할 거다”
En을 N으로, E를 뺐다 넣었다
황해문화에 실리자 겁나기 시작
막상 ‘고은 맞냐’ 물은 언론 1곳

- 시 ‘괴물’을 발표할 때, 파장을 예상했습니까.

“ ‘황해문화’에서 청탁이 온 게 2017년 9월이었어요. 젠더·페미니즘 특집을 한다면서, 시 세 편을 써달라고 했습니다. 청탁이 오면 무조건 기쁘죠. 게다가 원고료도 괜찮았어요(웃음).”

- 시를 쓰는 데 오래 걸렸는지요.

“저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씁니다. 퇴고를 많이 하긴 하지만요. 초고를 완성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 탈고한 뒤 고민이 시작됐나요. 원고를 보내야 하는지….

“그렇죠. 보통 써지면 바로 보내는데, 그렇게 못하겠더라고요. 마감이 10월20일이었는데, 20일 새벽에 일단 보내고 그날 밤 자정 무렵에 또 고쳐 수정본을 보냈습니다. 시 청탁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리우드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기 시작했어요. 사실 한국에서는 이미 ‘문단 내 성폭력’이 불거지기 시작한 뒤였죠. 2016년 가을에 여고생들이 문학 선생님을 고발했거든요.”

- 그 여고생들에 대한 부채감이 있었나요.

“뒷북을 친다…는 자괴감…. 시인은 창조적이어야 하고, 앞서가야 하는데…. 현상을 따라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문단이 시끄러워질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까.

“(파장이) 그렇게 커질지는 생각 못했어요. 할리우드에서 미투가 시작된 터라, 지인 몇몇에게 읽어주고 보여줬어요. 시 쓰는 친구는 재미있다고 했어요. 특히 ‘노털상’이란 표현이 재밌다고. 교유하고 지내던 고종석 작가에게도 물어봤어요. ‘발표해도 될까요?’ 답은 ‘일단 보내. 싣고 안 싣고는 그쪽에서 판단하겠지’. 다시 물었어요. ‘시로도 괜찮나요?’ ‘난 좋네’라는 답이 오더군요.”

고은 시인.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은 시인. 경향신문 자료사진

# 이 재판은 그의 장례식 될 것

“여성들의 미래 걸고 싸우겠다”
성폭력 역고소 맞선 긴 법정싸움
변호사 선임 난관, 소송 시작 후
지지글 사라지고 문단은 침묵

- 문인 외에, 발표 전 ‘괴물’에 대해 들은 사람이 있었나요.

“황해문화에 보내기 전 지인 두 명과 점심을 했어요. 그 자리에서도 할리우드 미투가 화제가 됐습니다. 제가 ‘괴물’ 선생 이야기를 했어요. 한 명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최영미가 발설하면 최영미는 매장당할 거다.’ 그때부터 잠 못 들 정도로 걱정했지요. ‘En’을 ‘N’으로 고쳤다가 ‘E’를 넣었다 뺐다, 수도 없이 반복했습니다. 나중엔 스스로 넌더리가 나더군요. 시인으로 자존심이 있지. 이것도 못 쓰면 최영미가 시인이든 작가든 하지 말아야지. 그냥 고(Go)하자, E를 붙여 보냈습니다.”

- 황해문화에선 뭐라고 하던가요.

“처음에는 별다른 연락이 없었어요. 잡지가 발간될 즈음, 2017년 12월 초에 김명인 주간이 연락을 해왔습니다. ‘싣기로 했다. 문제가 되긴 할 것 같다. 마음의 준비 하시라.’ 속으로 ‘차라리 싣지 말지’ 싶기도 했어요. 마음 한구석에서 겁이 나기 시작한 거죠.”

- 파장에 대비한 부분이 있습니까.

“방침을 정했어요. 언론사에서 연락 오면 ‘En의 실명은 확인 안 해준다’ ‘인터뷰에 응하지 않겠다’는 두 가지였죠. 처음에 인천 지역 언론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첫마디가 ‘그 시인이 고은 맞느냐’였습니다. ‘말해줄 수 없다. 문학작품으로 봐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게 끝이었어요. 잔뜩 준비하고 있는데 더 이상은 연락이 안 왔습니다.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들으니 En 선생이 문학권력이라 부러 외면한 것 같더라고요.”

서지현 검사가 공개적으로 미투에 나서면서 ‘괴물’도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최영미는 2018년 2월 JTBC <뉴스룸>에 나갔다. 저명한 여성 시인의 생방송 출연은 주목받기에 충분했다.

“생방송 제의를 받고 고민했습니다.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비겁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뉴스룸>이 8시에 시작하는데, 7시쯤 (방송사에서) 전화 와서 당장 오라고 하더군요. 오리털 패딩 뒤집어쓰고 택시 타고 갔습니다. 분장실에서 딱 10분간 대본을 봤어요.”

2018년 7월. 고은이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미투 이후 백래시(역풍)의 전형으로 거론되던 ‘역고소’다. 8월 기자회견에 나선 그는 단호했다. “개인의 명예만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여성들의 미래가 걸려 있으므로 모든 것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이 재판은 그의 장례식이 될 겁니다.”

최영미 시인.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최영미 시인.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 1년4개월여의 법정싸움 동안, 가장 큰 고비는 언제였습니까.

“변호사 선임이었죠. 한여름이라 법원 휴정기(재판을 쉬는 기간)였어요. 당연히 변호사들도 휴가 기간이었죠. 한 지인이 연락을 해왔어요. 한국여성변호사회(여변)라는 곳이 있다, 아직 변호사 선임을 안 했다면 거기에 하는 게 좋겠다고요. 조현욱 여변 회장을 찾아갔습니다. 사건 내용을 듣더니, 바로 사건을 맡겠다고 하셨어요.”

- 문단 주류의 조력은 거의 받지 못했지요.

“성명 하나 나오지 않았어요. 물론 개인적으로 도와주신 분들은 있습니다. 저의 미투를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하신 분은 문정희 시인이었어요. 소송에 걸리기 전에 밥을 사며 격려해주셨지요. 그런데 소송이 시작된 후엔 조용해졌어요. 소송 전 소셜미디어에 저를 지지한다는 글을 올린 분도 글을 내리더라고요. 물론 미래가 창창한, 젊은 시인들의 사정은 이해됐어요. 앞길이 막힐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미 문단에서 자리 잡은 원로·중견 문인들의 침묵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 왜 침묵했을까요.

“고은이 권력이니까, 괜히 정의감에 나섰다가 피해를 볼까봐…. 고은보다 그를 키운 문단권력이 두려웠겠지요. 그들이 주는 문학상을 못 탈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인맥이 없기도 하고요.”

- 그 이후에도 문단은 크게 변한 게 없습니까.

“문단에 안 나가서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쉽게 변하는 사회는 아니지요.”

법정싸움을 이어가는 동안, 그는 언론 인터뷰도 자제했다. 소송에 영향을 미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용기를 내 지난해 6월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을 출간했다.

- 시집에 대한 반응이 좋다고 들었습니다.

“7쇄, 1만2000부를 찍었어요.”

# 1인 출판사, 닥치니까 되더라

작년 신작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주요 출판사들은 출간 꺼려
숫자에 약한 기계치의 일상 변화
몸의 피를 바꾸듯이 7쇄 찍었죠

- 기존 출판사에서 출간을 꺼려 1인 출판사(이미출판사)를 차렸다고요.

“모든 출판사를 접촉해본 건 아니지만, 한두 군데 접촉해보니 메이저 출판사에선 출간을 꺼린다는 걸 감지했지요.”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에는 ‘사업자등록’이라는 작품이 들어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드나들던 머리에/ 계산서와 어음과 물류창고를 집어넣고// 당신, 그대, 님, 벗……/ 구름처럼 잡히지 않는 이름들을 부르던 가슴에/ 공급자와 공급받는 자, 등록번호를 새겨 넣고/ 회계와 세무의 전문가에게 설명을 들어도 아리송/ 공급자와 공급받는 자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업자./ 숫자에 약해 그쪽으론 베개도 베지 않았으나…”

- 출판사 대표로 산다는 건, 시인으로서의 삶과는 다르지요.

“내 생애에 사업자가 되다니…. 제 몸의 피를 바꾸는 것 같은 고통이었죠. 저는 유난히 숫자에 약하고 기계치이기도 해요. 그런데 닥치니까 하게 되더라고요.”

그는 ‘일상’이 변했다고 했다. “(책 주문을 알리는) 팩스로 아침을 시작해요. 그 팩스 소리가 너무 달콤합니다(웃음).”

최영미는 1992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혁명과 사랑에 대한 환멸을 노래했다는 평가를 받은 시집은 59쇄, 50만부를 돌파한 베스트셀러다.

-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영광이자 족쇄일 것 같습니다.

“원래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소설이 안돼 시로 돌아섰습니다. 얼떨결에 시인이 됐지요. 첫 시집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미움도 받았습니다. 저한테는 안 좋았던 것 같아요. 다른 작가들처럼 단행본 한 권 두 권 내고, 세 권부터 잘되고, 이런 게 정상적인 건데…. 문단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실수를 여러 차례 했습니다. 언론을 대하는 일도 잘 몰랐고, 적도 많이 만들었지요. 이른바 ‘솔직하다, 도발적이다’ 같은 이미지에 갇혀 있었습니다. 정신차리고 보니 극복하고 싶어졌어요. ‘도발적’이라는 형용사처럼 저랑 안 어울리는 말도 없거든요. 제가 얼마나 겁이 많은데요…. 차선 바꾸기 무서워 운전도 못해요. 다만 글을 쓸 때만 두려움이 없고, 자기검열을 안 하는 편이죠.”

◆“피해자 입 닫게 하려는 흐름 막아 기뻐…모두 ‘쉽게’ 행복하시길”

최영미 시인이 지난해 6월 펴낸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에는 고은 시인의 성추행을 묘사한 ‘괴물’과 소송에 임하는 의지를 담은 ‘바위로 계란 깨기’가 실려 있다. 사진은 책을 촬영한 것은 아니며, 시 두 편을 다른 이미지와 결합해 형상화한 것이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최영미 시인이 지난해 6월 펴낸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에는 고은 시인의 성추행을 묘사한 ‘괴물’과 소송에 임하는 의지를 담은 ‘바위로 계란 깨기’가 실려 있다. 사진은 책을 촬영한 것은 아니며, 시 두 편을 다른 이미지와 결합해 형상화한 것이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에게

“두려움 외에 두려움은 없다”
미투는 남·여 싸움이 아니라
관행·잘못된 가치관과의 결별
과거와 미래의 싸움을 의미

-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습니까. 아니면 소설이나 산문은요?

“연애소설 한 권 쓰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계기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연재 제의가 온다든가, 생활비가 떨어진다든가…(웃음).”

2016년 5월 최영미는 페이스북을 통해 저소득 근로자에게 지급하는 근로장려금 대상이 된 사실을 털어놨다. 세무서의 전화에 충격을 받았다는 그는 “공돈이 생긴다니 반갑고 (베스트셀러 시인이란 선입견 없이) 나를 차별하지 않는 세무서의 컴퓨터가 기특하다”면서도 “그런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라고 했다.

- 생활고를 고백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요즘 생활은 어떻게 꾸리고 있습니까.

“근로장려금은 그 전해 수입이 세무서 기준으로 1300만원인가를 넘지 않고 무주택에다 몇 가지 조건이 되면 줍니다. 다른 작가들도 많이 해당될 거예요. 사실 올해도 받았어요. 지난해 재판하느라 수입이 줄었거든요. 수입의 주종이 강연인데 (재판이 시작되자) 기업체와 지자체 강연 요청이 뚝 끊겼습니다. 1심에서 승소하자 강연 요청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럭저럭 먹고살아요. 먼 미래까지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간병하고 있다. “내가 아는 똥은 더럽지 않다/ 내가 모르는 똥은 더러워,// 6인 병실의 화장실 변기에 묻은 누군가의 흔적은 기겁을 하고 치우면서, 비닐장갑을 끼고도 찜찜해 손을 씻고 또 씻으면서, 열흘 만에 구경한 내 어미의 똥은 사랑스러워 ‘엄마 오늘 예쁜 똥 쌌다’고 사진을 찍어 동생들에게 보낸다……”(‘간병일기’)

# 저소득·가족돌봄노동자로서

아들 없는 집 장녀로 모친 간병
먼 미래까지는 생각 안 하는 삶
다시 태어난다면 글 쓰지 않고
운동선수나 배우 돼보고 싶어

- 간병은 지금 중년 세대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인데요.

“간병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싶을 지경이에요. 아버지는 2014년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요양병원에 3년6개월간 계셨어요. 자유롭게 살아왔는데, 40대 후반에 들어 아들 없는 집 장녀로서 책임감이 몰려왔습니다. (간병은) 지난 몇 년간 제 인생의 가장 큰 부분이에요. 제 가방에 뭐가 들어 있느냐면 비닐장갑, 물티슈 이런 것들이에요. 최소한 이런 소모품은 병원에서 대주면 좋겠어요. (정부의) 의지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아닐까요. 제가 날마다 병원에 가는데, 제가 안 가면 어머니가 물을 안 드세요. 오줌을 싸서 기저귀뿐 아니라 침대 시트까지 젖었다고 간병인에게 크게 한 번 야단맞은 뒤 (물을 마시면 또 오줌 싸서 혼날까봐) 강박증이 생겨서 안 드세요. 엄마가 편찮으신 뒤로 3년간 이틀 이상 여행을 한 적이 없어요. 최근(지난해 11월) 대만에서 열린 ‘세계 여성 쉼터 콘퍼런스’에 3박4일간 다녀온 게 유일합니다. 그런데 제가 대만으로 떠나자마자 어머니가 낙상을 당하셨어요. 정말 1주일에 단 하루라도 쉬고 싶어요.”

코치의 성폭력을 용기 있게 폭로한 쇼트트랙 스타 심석희 선수는 최근 “제가 또 다른 피해자분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다면, 그분들도 용기를 내서 일어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경향신문 인터뷰)고 말했다. 최영미에게,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지 물었다.

“두려움 그 자체 외에 두려움은 없다(Nothing to fear but fear itself)는 말을 하고 싶어요.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한 말입니다. 미투는 남성과 여성의 싸움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싸움입니다. 과거의 나쁜 관행, 권력남용, 잘못된 가치관과의 결별을 의미합니다. 이번에 승소하고 기뻤던 것도, 피해자의 입을 닫게 하려는 흐름에 제동을 걸 수 있게 돼서입니다.”

지난해 말, 고은의 상고 포기로 승소가 확정된 뒤 최영미는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나는 작은 바퀴 하나를 굴렸을 뿐. 그 바퀴 굴리는 데 나의 온 힘을 쏟았다.” 긴 싸움을 끝낸 최영미는 다시 출발선에 섰다. 새로운 산문집과 시집 <돼지들에게> 개정증보판을 펴낼 예정이다.

[커버스토리]‘썩은 계란의 피라미드’를 깨다

- 10년 만에 산문집을 낸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지난해 나왔어야 할 책이에요. 2018년 봄에 원고가 다 넘어갔는데, 재판에 영향을 미칠까 염려되어 출간을 뒤로 미뤘습니다.”

- 어떤 내용입니까.

“지난 4~5년간 쓴 글을 모은 건데요. 미투 이야기도 들어갑니다.”

- 다시 태어나도 글을 쓸 건가요. 아니면 사랑하는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할 건가요.

“(고개를 저으며) 아니요! 몸 쓰는 일을 하고 싶어요. 축구 감독이나 운동선수가 되고 싶고, 배우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이창동 감독이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시나리오를 쓸 때, 문성근씨의 상대역을 제안한 적이 있어요. 이 감독이 ‘영화 출연하면 최영미씨 인생이 바뀔 것’이라고 했어요.”

- 그런데 왜 안 했습니까.

“대학원(홍익대 미술사학과) 논문 마지막 학기이기도 했고, 영화에 출연하면 제 인생이 바뀐다는 말에 겁이 나더라고요. 시인으로 잘나갈 때라….”

인터뷰를 앞두고 최영미는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을 보내왔다. 표지 안쪽에 ‘쉽게 행복하시길…’이라고 써 있었다.

- ‘쉽게’ ‘행복하기’는 일종의 형용모순 아닌가요.

“사람들은 보통 행복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맛난 것 먹어도 행복하고, 친구들과 이야기해도 행복하지 않은가요. 저는 ‘쉽게 사랑하시길’이란 말도 많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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