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가해 계속돼도 ‘절차’만 앞세워...감정노동자 ‘피할 권리’ 보장해줘야”

2021.07.01 06:00

한인임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전국네트워크 정책팀장

대형마트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그린 영화 <카트>(2014)의 한 장면. 마트 계산원은 한국 뿐 아니라 서구에서도 대표적인 여성 일자리에 속한다.

대형마트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그린 영화 <카트>(2014)의 한 장면. 마트 계산원은 한국 뿐 아니라 서구에서도 대표적인 여성 일자리에 속한다.

2018년 산안법에 보호 규정…기업 등서 법 취지 구현 못해
가해 상황에선 즉시 응대 중지·회사가 직접 고발 등 제시
용역·협력업체 노동자도 ‘보호대상’…단체협약에 넣어야

‘손님은 왕이다’라는 슬로건 아래 고객 앞에서 말투와 표정, 몸짓 등 감정표현을 끊임없이 연기해야 하는 감정노동자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고객과의 전화 통화에서 다툼이 생기자 통화 종료 후 구토 증상을 호소하며 쓰러진 콜센터 직원, 고객에게 성희롱과 폭언을 듣고 정신적 고통을 받은 끝에 적응장애가 나타난 대형마트 직원은 모두 산업재해로 인정된 사례들이다. 2018년 국회는 산업안전보건법에 감정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규정을 넣었다. 고용노동부와 각 지방정부, 기업들은 감정노동자 보호 매뉴얼을 만들었다. 그러나 법 취지가 제대로 구현되기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전국네트워크(이하 네트워크)’가 지난달 <감정노동자 보호 매뉴얼>을 발행했다. 2013년부터 해온 연구·입법활동을 토대로 만든 모범적인 매뉴얼이다. 이번 매뉴얼을 만든 한인임 정책팀장(52)을 지난 29일 서울 중랑구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일과건강 사무실에서 만났다.

매뉴얼엔 감정노동의 개념부터, 관리조직이 어떻게 구성돼야 하는지, 고객 유형별 대응 방식, 모범적인 단체협약 예시 등이 담겼다. 핵심은 감정노동자에게 고객의 가해로부터 ‘피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한 팀장은 현재 공공기관이나 민간 기업에서 사용하고 있는 매뉴얼을 분석해 보면 이같은 피할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화 응대를 할 때 고객으로부터 욕설이나 성희롱 발언을 들으면 바로 끊어야 하지만 바로 끊을 수 없고 ‘고객님, 이렇게 하시면 응대가 제한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게 돼있어요. 여러 번의 욕설을 듣고 절차를 밟은 뒤에야 전화를 끊을 수 있는 거예요. 그 사이 이미 노동자는 트라우마 상태가 되죠. 강도가 높은 폭력에 대해서는 바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권리를 구현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매뉴얼은 법의 취지를 훼손한다고 봐요.”

그래서 네트워크가 만든 매뉴얼에선 성희롱이나 폭언·폭행 등의 상황에 처했을 때 노동자는 즉시 응대를 중지하고, 관리자에게 알려 관리자가 가해자를 응대하도록 했다. 전화 응대의 경우 가해자에게 ‘폭언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응대하지 않는다’는 안내멘트를 보내고, 가해자 번호는 3개월 유입차단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법도 제시했다.

한인임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전국네트워크’ 정책팀장이 지난 29일 경향신문 기자와 만나 얘기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한인임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전국네트워크’ 정책팀장이 지난 29일 경향신문 기자와 만나 얘기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피해를 입은 감정노동자가 직접 가해자를 고소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회사가 나서서 고발하는 등 법적 대응을 하도록 한 점도 매뉴얼과 현행 법의 차이다. 현행 법상으로는 감정노동자가 가해자에 대해 법적 대응할 경우 회사는 필요한 지원만 해주도록 돼있다. “노동자들이 욕설을 들었다고 해서 가해 고객을 고소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대부분의 서비스 노동자는 명찰을 달고 있거든요. 가해자가 자신의 이름과 일하는 장소를 아는데 고소할 경우 언제 해코지 할 지 알 수 없고요. 누가 막아주지도 않는데 두렵죠. 고소 자체가 어려운데 법률 지원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요? 인적·물적 자원을 가진 회사가 고발을 해서 피해자를 완전히 보호하자는 게 저희의 제안이예요.”

매뉴얼엔 고객의 합리적인 컴플레인(민원)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부분도 새롭게 들어갔다. 흔히 감정노동자의 피해는 소위 ‘갑질·진상 고객’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한 팀장은 설명했다. 대부분은 고객이 합리적인 컴플레인을 하는 경우였다.

“소비자단체와 함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당신은 노동자에게 왜 화를 냈는지’를 물어봤어요. 우리는 진상 고객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너무 많이 기다리게 해서’ ‘전화를 여러번 돌려서’ 같은 답변이었어요. 충격이었죠. 결국 기업이 내가 원하는 속도와 정보를 제대로 제공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합리적인 컴플레인을 했던 거예요. 결과적으로 기업의 경영시스템이 잘못돼서 노동자와 소비자가 싸우고 있는 꼴이었죠.” 콜센터 노동자는 화장실도 못가고 전화를 받는데, 회사가 적절한 인력배치를 해주지 않아 고객은 전화를 안 받는다고 노동자에게 화를 내는 식이다. 기업들이 ‘CS(고객만족)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고객에 대한 친절을 강조해왔지만, 진정한 질 높은 서비스를 만들려면 정확한 정보를 신속하게 제공할 수 있는 직무교육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매뉴얼에 들어갔다.

감정노동 개념부터 관리조직 구성·고객 대응 방식 등 담은 ‘감정노동자 보호 매뉴얼’ 발간

감정노동 개념부터 관리조직 구성·고객 대응 방식 등 담은 ‘감정노동자 보호 매뉴얼’ 발간

매뉴얼엔 고객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폭력 예방 포스터나 문구를 게시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사전적으로 피해를 방지하려는 취지다. 또 고객이 컴플레인을 했다는 이유로 노동자에게 직접 사과하라고 지시하거나 집으로 찾아가 사과하고 오라는 등의 요구는 2차 가해이기 때문에 금지된다.

‘위험의 외주화’ 영역에 있는 용역이나 협력,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은 감정노동자 보호에 있어서도 사각지대에 놓이기 쉽다. 그래서 매뉴얼은 이들도 보호대상이라고 명확히 규정했다. “감정노동 예방과 관련한 조항에 대해서는 하청, 파견 등 고용형태를 불문하고 동일 사업장 노동자에 일괄 적용한다”는 문구를 감정노동 관련 단체협약에 넣도록 제시했다.

한 팀장은 사업주들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공공기관이든 민간기업이든 고객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한국사회를 몰아왔는데요. 기업 입장에서 악성 고객은 비용이거든요. 노동자들의 정신건강이 나빠져서 제대로 된 서비스도 못하게 되는 것이고 산업재해로도 인정돼 노동력 손실도 있는 것이고요. 지금까지는 악성 고객들 얘기를 다 들어주면서 (사업을) 키워왔는데, 정작 감정노동자 보호에 있어서는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아요. 기업들이 제대로 법을 지키면 좋겠어요.”

■고객에 성희롱·욕설 들어도…최대 ‘7단계’ 거쳐야 전화 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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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관·민간기업 ‘고객응대 업무 매뉴얼’ 보니


2018년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사업주는 고객의 성희롱이나 폭언·폭행 등으로부터 감정노동자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문제상황 발생 시 대처 방법 등을 담은 매뉴얼을 마련해야 한다. 이에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전국네트워크(이하 네트워크)’가 지난 2월 현재 공공기관과 민간 기업에서 사용하고 있는 고객응대업무 매뉴얼을 분석했봤다. 그 결과 감정노동자 상당수가 고객으로부터 폭언 등의 피해를 입은 즉시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고, 3~7단계에 걸쳐 자제 안내 절차를 거쳐야만 고객 응대를 종료할 수 있는 등 반복적으로 피해에 노출되도록 한 것으로 나타났다.

A지역 콜센터의 매뉴얼은 고객이 성희롱·욕설 등을 했을 때 노동자가 바로 전화를 끊지 못하고 자제해줄 것을 요청하는 멘트를 하라고 돼있었다. 2단계에 상담이 종료될 수 있다고 안내 멘트를 한 뒤 다시 폭언을 한 경우, 3단계에 가서 ARS(자동응답)로 넘어가 응대를 종료하도록 한 것이다. 대부분의 콜센터가 2~3단계에서 응대 종료가 가능했다. B마트는 고객이 지속적으로 폭언할 경우 정중히 자제해줄 것을 3회 요청한 후에 응대를 종료하도록 매뉴얼을 짰다.

C백화점 입점업체는 노동자가 폭언을 듣고도 7단계에 가서야 응대를 종료할 수 있도록 했다. 수 차례 자제를 요청하고 처벌 가능성과 책임자를 부르겠다고 안내한 끝에 7단계에 가서야 응대를 종료할 수 있도록 했다. D공공기관은 성희롱 발언은 2단계, 욕설은 3단계, 단순 폭언은 4단계까지 듣고나서야 응대를 종료할 수 있었다. 폭행은 1단계에서부터 피해자 대피 및 민원인 제지 조치가 이뤄지지만, 위험물 소지자는 일단 대화를 통해 진정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네트워크는 “전체적으로 오랜 시간 폭언과 폭력에 노출될 수 있는 구조로 설계돼있다”고 지적했다.

매뉴얼이 고객에 대한 ‘친절 서비스’를 기반으로 구성돼 감정노동자의 피해 보호 취지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사례도 있었다. E공공기관은 고객이 화를 냈을 경우 우선 고객의 발언을 경청하고 공감하면서 사과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밖에 피해 노동자에게 심리상담과 휴식 시간을 보장하지 않는 곳들이 있었고, 구체적인 절차를 명시하지 않은 모호한 내용의 매뉴얼도 다수 있었다. 네트워크는 “각 자료별 구성이 다르고 매뉴얼의 일부만 제공된 경우도 있어 모든 내용을 살펴보기는 어려웠지만, 전반적인 문제는 노동자가 가해 고객으로부터 ‘피할 권리’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라며 “원 스트라이크 아웃제(고객이 1회 폭언시 바로 차단)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경기 고양시 콜센터는 좋은 사례로 꼽혔다. 일단 “산업안전보건법 고객응대근로자 보호조치에 따라 상담사에게 폭언 등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음성을 내보내도록 했다. 폭언을 들었을 때 노동자가 1차적으로만 육성으로 상담내용 녹취와 사법처리 가능성을 고지하고, 2번째부터는 바로 ARS 멘트로 넘어가도록 했다. 악성 민원 때문에 매뉴얼에 따라 응대를 중지한 때는 인사 평가에 반영하지 않고, 폭언·폭력으로 응대 중지 후엔 해당 고객과 재접촉을 금지했다. 네트워크는 “비교적 꼼꼼한 구조로 잘 만들어져 있다”며 “가해 고객과 재접촉을 금지한 것도 좋은 제도”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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