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라는 이름으로 은폐된 ‘위선 없는 무례함’

2021.08.27 16:55 입력 2021.08.27 18:19 수정
칼럼니스트 위근우

<나 혼자 산다> 기안84 왕따 논란과 리얼리티 예능의 실체적 진실

지난 13일에 방영한 <나 혼자 산다>에서 만화가 기안84는 <복학왕> 완결 기념 여행을 준비하고 기대에 들뜨지만, 정작 전현무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오지 않았고 기안84는 역력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해당 프로그램 화면 캡처

지난 13일에 방영한 <나 혼자 산다>에서 만화가 기안84는 <복학왕> 완결 기념 여행을 준비하고 기대에 들뜨지만, 정작 전현무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오지 않았고 기안84는 역력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해당 프로그램 화면 캡처

실패한 사과문은 언제나 흥미로운 텍스트다. 말한 것보다 말하지 않은 것에 더 많은 의미와 진실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난 8월21일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올린 MBC <나 혼자 산다> 제작진의 사과문은 철저한 저자세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사건의 진실에 대해선 함구한다. 지난 13일에 방영한 <나 혼자 산다>에서 만화가 기안84는 <복학왕> 완결 기념 여행을 준비하고 기대에 들뜨지만, 정작 전현무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오지 않았고 기안84는 역력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시청자 상당수는 기안84가 나머지 멤버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고, 특히 여행 및 녹화 당일 마치 힘들어도 갈 것처럼 기안84를 속였다던 키의 발언을 증거처럼 받아들였다. 엄청난 후폭풍이 지나가고 해당 에피소드가 마무리된 뒤에야 제작진은 “멤버들 간의 불화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세심하게 챙기지 못한 제작진의 불찰로, 여러 제작 여건을 고려하다 보니 자세한 상황 설명이 부족했습니다”라고 사과 및 해명했다. 이 사태가 제작진의 불찰이라는 것도 멤버 불화설은 사실무근이란 것도 모두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이 진실은 공허하다. 제작진의 불찰이란, 제작 여건의 고려란, 자세한 상황 설명의 부족이란 무엇일까. 어설픈 궁예 놀음으로 사건을 재구성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사과문은 이미 다 노출되었지만 다들 모르는 척하는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존재한다. 소위 관찰 예능이라 불리는 리얼리티쇼는 솔직한 무례함의 전시와 소비를 통해 지탱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

지난 8월21일 MBC <나 혼자 산다> 제작진은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기안84 따돌림 논란과 관련한 사과문을 올렸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상황설명이 부족하다” 등등 아쉬움을 표시하는 답글로 응수했다.

지난 8월21일 MBC <나 혼자 산다> 제작진은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기안84 따돌림 논란과 관련한 사과문을 올렸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상황설명이 부족하다” 등등 아쉬움을 표시하는 답글로 응수했다.

이번 사태가 흥미로운 건, 새로운 사건이 벌어져서가 아니다. 반대로 <나 혼자 산다>는 그동안 기안84를 소비하던 방식 그대로 활용했다. 차이가 있다면, 그 방식을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게 드러냈다는 거다. 분위기가 흉흉하고 청결과는 거리가 먼 폐가를 단합 대회 숙소로 잡고 고무 대야에 바퀴를 달아 봅슬레이 놀이를 하자는 기안84의 계획은 해맑은 무례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다른 멤버들이 오지 않을 가능성은 자신의 뇌 밖에 있었다고 말했지만, 이런 이벤트가 다른 멤버들도 즐길 만한 것인지에 대한 고려 역시 뇌 밖에 있었다. 공포 체험으로 멤버들이 끈끈해지리라는 믿음은 선의를 담고 있지만 정작 그걸 직접 체험할 이들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으면 결과적인 무례함으로 소급된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의 진실은 다음과 같다. 만약 정말로 저 엉망진창인 단합 대회에 멤버 전체가 모여 고생했다면 기안84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비난받았을 거라는 것. 하지만 이것을 마냥 다행이라 여기면 그동안 <나 혼자 산다>가 기안84를 이용해 기만적으로 쌓아올린 가상의 리얼리티가 무너진다. 기안84의 꾸밈없는 모습으로 관찰 예능의 리얼리티를 확보해 왔지만 이는 제작진의 의도 안에서 선별된 꾸밈없음이다. 다시 말해 제작진은 기안84의 괴상한 계획과 실행을 의도적으로 방관하되, 그것이 최악의 에피소드로 이어지는 것은 막기 위해 개입했다. 그러니 다른 멤버들을 부르지 않고 오지 않는 것을 제작진은 왜 함구했느냐는 게 아니라, 그건 함구하면서 저 말도 안 되는 폐가 단합 대회 준비는 왜 그대로 진행했느냐고 질문해야 한다. 그 선별적이고 의도적인 과정이 바로 사과문에 언급된 ‘제작진의 불찰’이자 ‘제작 여건’이며 ‘자세한 상황 설명’을 할 수 없는 영역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상당히 투명하게 드러난 진실이다. 다만 투명하기에 외면해야 한다. 제작진도, 시청자도.

기안84 따돌림 논란이 불거지자
해당 화 끝난 뒤 제작진 사과문
멤버들 불화설은 사실 아니겠지만
자신들의 ‘불찰’은 외면한 제작진

MBC <안 싸우면 다행이야> 허재
기분의 좋고 나쁨을 그대로 드러내
쇼는 그것을 솔직함으로 눙쳐

제작진 의도 속 ‘선별된 꾸밈없음’
정제되지 않은 무례함을 전시하고
이를 판매·소비하는 이들은
진짜 진실을 모른 척하고 있을 뿐

<나 혼자 산다>가 기안84를 다루는 방식은 항상 양가적이었다. 비연예인이자 말과 행동에 필터링이 없는 그의 태도는 말하자면 진정성이라는 이름의 구경거리에 가까웠다. 제작진의 개입과 별개로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자신을 연기하면 되는 리얼리티쇼의 시대에 가식 없음과 무례함 사이를 오가는 기안84의 행동들은 쇼의 진정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알리바이로 기능한다. 그러니 웬만하면 사람들이 하지 않을 행동을 하는 것을 희화화하고 구경거리로 만드는 동시에, 마치 그것이 인간적이고 솔직한 미덕이라도 되는 양 양가적 태도를 취한다. 과거 ‘세 얼간이’ 멤버끼리의 울릉도 여행에서 그가 불필요한 고집을 부리며 이시언과 갈등을 빚는 모습을 실컷 중계한 뒤, “제가 살다 보니 이렇게 자라났는데 앞으로 조심하겠다”는 본인 사과와 출연진의 다독거림으로 마무리하는 건 <나 혼자 산다>에서 수없이 등장한 패턴이다. 배우 성훈이 모델로 참여한 런웨이를 보며 큰 목소리로 응원하는 기안84의 모습을 방영한 뒤 더는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개인에 대한 비난 여론이 커지자 한의사 이경제를 출연시켜 폐가 안 좋은 걸 마음의 병으로 착각하는 거라느니 “자기가 고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느니 전문 지식과 거리가 먼 사이비 진단으로 그의 공황장애를 우스갯거리로 만들고 그동안 기안84가 논란이 될 행동을 할 때마다 순수한 캐릭터로 포장하고 부추겼던 제작진의 책임은 싹 지워버리기도 했다. 올해 초 PD가 교체됐지만 패턴은 그대로다.

농구인 출신 허재의 호통 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안 싸우면 다행이야>의 한 장면. 해당 프로그램 화면 캡처

농구인 출신 허재의 호통 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안 싸우면 다행이야>의 한 장면. 해당 프로그램 화면 캡처

물론 <나 혼자 산다>만의 문제는 아니다. 예의 바른 위선보단 솔직한 무례함이 인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한국 사회에서 MBC <라디오스타>는 김구라의 무례한 진행을 통쾌함으로, SBS <미운 우리 새끼>는 수많은 중년 남성 출연자들의 미성숙한 주접을 철없는 귀여움으로 소비해왔다. 그러다 기안84가 등장했다. 역시 비연예인이자 방송용 위선에 익숙하지 않은 왕년의 농구 스타 허재가 최근 비슷한 방식으로 자주 활용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여기엔 남성 출연자의 실수와 무례함에 훨씬 관대한 이중 잣대도 크게 작용하지만 그것까지 다루진 않겠다). MBC <안 싸우면 다행이야>의 단골 게스트인 그는 최근 방송에서‘도’ 식사 준비 중 본인 기분의 좋고 나쁨을 그대로 드러냈고 그의 솔직한 감정 기복에 대해 스튜디오 진행자인 붐은 “석류를 먹어야 한다”고 눙쳤다. 유명한 “이게 불낙(블락)이야?”란 그의 감독 시절 호통은 웃음용 ‘짤방’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현재 그의 불같은 호통과 짜증을 시청자가 볼 이유는 별로 없다. 그럼에도 쇼를 만들고 즐기는 사람들은 이것이 날 것의 감정이자 리얼이라 말한다. 실은 정제되지 않은 무례함을 서커스처럼 전시하는 동시에, 마치 그것만이 자연스럽고 솔직한 것이며 마치 어떤 가치라도 있는 것처럼 꾸미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기안84 따돌림 논란이라는 아무 근거 없는 해프닝은, 그래서 기안84에 유독 깊이 이입하고 몰입하는 일부 시청자들의 억지만은 아니다. 정제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풍경 바깥에 무엇을 담거나 빼는 카메라의 노골적인 선택이 있음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대신, 카메라 바깥에서의 출연자들의 사적인 따돌림을 가정하고 그들의 작은 제스처 하나하나로부터 기안84에 대한 비웃음을 읽어내야 리얼리티쇼의 가상을 유지할 수 있다. 전자에 대한 질문은 이 가상을 무너뜨리지만, 출연자들이 기안84를 따돌렸느냐 따돌리지 않았느냐는 가짜 질문은 아무리 공격적일지언정 이 가상에 아무 타격도 주지 못한다. 제작진도 진실을 말하는 대신 가짜 질문에 대한 해명과 사과만 하면 된다. 누군가의 무례함과 실수를 구경거리 삼고 즐기되 제작진의 책임과 시청자의 은밀한 죄의식을 리얼리티란 알리바이로 희석시킨 관찰 예능의 진실은 의도적으로 외면된다. 이것을 판매자와 소비자의 공모 혹은 적대적 공생이라 부를 수 있을까. 확실한 건, 위선 없는 무례함과 고집이 재밌거나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려면 꽤 많은 이들이 많은 걸 모른 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 빤하게 드러나는 순간에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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