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대신 식별번호, 아파도 우는 법을 모르는 실험견

2024.04.24 14:42 입력 2024.04.24 17:11 수정

구조된 실험견 입양하는 사람들

동물실험 여부 따져 ‘윤리적 소비’

‘세계 실험동물의 날’ 맞아

“대체시험법 적극 활용해야”

연구소 등에서 실험견으로 쓰였던 비글 제임스(왼쪽)와 꽃송이. 보호자 안소정씨는 구조된 두 비글을 입양했다. 안소정씨 제공 이미지 크게 보기

연구소 등에서 실험견으로 쓰였던 비글 제임스(왼쪽)와 꽃송이. 보호자 안소정씨는 구조된 두 비글을 입양했다. 안소정씨 제공

‘CFVAEC’와 ‘P012’.

안소정씨(50)와 함께 사는 비글 두 마리의 귀에는 이들이 과거 이름 대신 불리던 개체 식별번호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실험동물로서 연구소에서 오로지 연구 시료로만 쓰인 흔적이다. 안씨는 2018년 구조된 비글 ‘CFVAEC’에게 제임스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가족이 됐다. 이듬해 구조된 ‘P012’에겐 꽃송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제임스·꽃송이 엄마’가 됐다.

‘세계 실험동물의 날’인 24일 안씨는 두 반려견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안씨는 제임스와 꽃송이가 각각 연구소와 대학에서 왔다고만 알고 있을 뿐 어떤 실험에 동원됐는지는 모른다. 활발하기로 유명한 여느 비글들과 달리 유난히 조용한 모습에서 이들이 실험견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실험용으로 길러지는 비글들은 어릴 때부터 입질을 하지 않거나 아파도 소리내지 않도록 본성을 억누르는 훈련을 받기 때문이다.

안씨는 “제임스가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아도 짖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실험실에서 사료만 먹고 커서 그런지 처음에는 간식을 줘도 먹지 못했다”며 “이제 사회화가 많이 됐지만 아직도 비닐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나도 숨으려고 할 때 안쓰럽다”고 말했다.

실험견이던 제임스의 귀에는 연구소에서 불리던 개체 식별번호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안소정씨 제공 이미지 크게 보기

실험견이던 제임스의 귀에는 연구소에서 불리던 개체 식별번호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안소정씨 제공

모든 실험동물이 제임스와 꽃송이처럼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것은 아니다. 2019년 서울대 이병천 교수팀이 생산했던 복제견 ‘메이’는 복제 실험에 다시 동원된 뒤 숨졌다. 당시 서울대 사육사가 실험견들에게 청소용 고압수를 뿌리거나 이들을 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각종 실험에 동원되는 동물 수는 매년 늘고 있다. 농림축산검역본부의 ‘2022년 동물실험윤리위원회 운영 및 동물실험 실태조사 현황’을 보면 2022년 사용된 실험동물은 499만5680마리에 이른다. 2021년보다 11만5428마리가 늘었고 2018년보다 약 120만마리가 늘었다. 이 중 중증도 이상 고통을 동반하는 ‘고통등급 D’ 실험(26.2%)과 가장 심한 고통 수준의 ‘고통등급 E’ 실험(48.5%)에 사용된 비중은 약 75%에 달한다.

동물에게 고통을 안기는 실험이 근절되길 바라는 마음을 윤리적 소비로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직장인 최모씨(30)는 최근 각종 생필품을 구매할 때마다 동물실험 여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최씨는 “화장품 말고도 생리대나 세제, 치약 등 생활에 필요한 여러 물건이 동물실험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동물실험을 하는 브랜드 앞에서 시위는 하지 못하더라도 동물실험 여부를 (고객센터에) 문의하거나 소비를 하지 않는 식으로 압박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안씨처럼 직접 실험동물을 입양하기도 한다. 안씨는 “실험견은 아플 수 있다는 선입견이 있을 수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며 “실험견들이 구조돼도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은 만큼 입양이 활성화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민단체들은 이날 동물실험을 줄이기 위한 실질적인 대책을 촉구했다. 한국동물보호연합은 “동물실험 결과가 인간에게도 나타날 확률은 5~10%에 불과하므로 동전던지기보다도 못한 도박”이라며 “동물을 사용하지 않는 동물대체시험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서보라미 한국 휴메인소사이어티인터내셔널 정책국장은 “동물대체실험의 수요가 높지 않아 비용이 줄어들지 않으니 다시 동물실험을 하는 악순환이 생기고 있다”며 “화장품법에 따라 화장품 동물실험이 금지된 것처럼 (다른 분야에서도) 대체방법이 있으면 동물실험을 중지하도록 하는 강제조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동물보호연합 회원들이 세계 실험동물의 날인 2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동물실험 중단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한국동물보호연합 회원들이 세계 실험동물의 날인 2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동물실험 중단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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