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인가, 공화주의자인가

2012.05.14 21:24
박인하 |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창작

실장님 로맨스가 한동안 유행하나 했더니 지금은 왕이 친히 강림하셨다. 현실에서 왕정복고를 이야기하면, 바이칼호 영구임대 수준의 상상력으로 무시될 텐데, TV는 스스로 조선의 왕을 복벽(물러났던 임금이 다시 왕위에 오르거나, 수렴청정을 끝내고 집정하는 경우에 조선왕조실록에 사용된 용어)했다. 뭐든 해봐서 아는 재테크의 달인 대통령보다는 얼핏 철없어 보이지만 깊은 속내를 지닌 매력적 황제 이승기나 뭔가 질긴 인연으로 이어진 타임슬립 조선 왕 박유천 같은 이가 훨씬 매력적이기는 하다(일단 비주얼에서 1승 얻고 들어간다). 하지만 엄연한 공화주의 나라에서 왕정이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에이, 뭘 드라마를 가지고 그러느냐고?

생뚱맞아 보이지만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이 발표한 2012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청소년들의 고민 1순위는 공부(38.6%) 그리고 2순위는 직업(22.9%)이다. 2002년과 비교해서 눈에 띄는 건 직업의 순위 상승이다. 2002년 조사에서 직업에 대한 고민은 6.9%에 불과했다. 8.9%인 가정환경이나 19.7%인 외모와 건강보다 뒤 순위였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는 당당 2순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1등인 공부와 지분을 합해 보면 과반이 넘는다. 15~24세 청소년들이 친구 문제나 이성 문제 심지어 외모와 건강 같은 고민을 넘어 공부와 직업이 1, 2순위 고민이라는 거다.

물론 공부와 직업은 중요한 가치다. 공부와 직업을 통해 자아를 실현해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소년들이 공부와 직업에 대한 고민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만 할까 같은 자아실현의 고민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인다. 같은 조사에서 청소년들은 선호하는 직업의 1순위로 공무원을 꼽는다. 공기업으로 폭을 넓히면 무려 40%. 여기에 대기업을 포함하면 훌쩍 60%를 넘어선다. 같은 조사에서 초·중·고교생의 사교육 참여율이 71.7%다.

[별별시선]신민인가, 공화주의자인가

정리해 보자. 초등학교 때부터 과외를 받으며 상급학교를 준비한다. 목표는 가장 선호하는 직장인 ‘국가기관’에 들어가기 위해. 그래서 그 나이에 할 만한 친구에 대한 고민도, 이성에 대한 고민도, 심지어 외모에 대한 고민도 밀어놓고 죽어라 공부한다. 그렇게 죽어라 공부하다 성공한 몇몇 아이들은 서열화된 대학에 들어갈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경쟁은 계속된다. 스펙을 쌓고 자격증을 만든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고시에 준하는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마치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처럼, 한 번의 시험이 내 운명을 좌우한다.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에 들어가 영광스러운 ○○가족이 되는 순간, 우리 사회에서 인정받는 1인이 된다. 그리고 수많은 실패한 이들은 열패감에 괴로워한다.

아무리 봐도 이런 모습이 정상적인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개념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한 가운데에 마치 올림포스산처럼 성공의 산이 있다. 성공의 산에는 돈과 욕망의 신이 거주한다. 돈과 욕망의 신은 회장님들을 통해 강림한다. 신탁을 받은 영험한 회장님들께서는 우리의 권력은 돈의 신이 주신 것이니 우리가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 하시고, 또 우리의 성공이 나라의 성공이라 말한다.

충실하게 교육받은 왕국의 신민들은 편법으로 거대 기업을 아들에게 물려줘도, 형제끼리 아버지의 숨겨놓은 유산을 내놓으라며 싸워대도, 같은 공장에서 백혈병에 걸려 죽어나가도, 갑자기 해고통지서를 보내 공장에서 쫓겨나도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문제가 드러나 왕국이 무너질까봐 전전긍긍이다.

내가 그 기업에서 일하지 않고 있어도 우리는 한가족이라는 광고 카피에 고스란히 마음을 풀어 놓는다. 왜냐하면 내 아이들이 1등 신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 아이는 사교육을 받아가며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론 다른 나라에 가서 왕국의 로고를 발견하면 가슴이 찌릿하다. 이럴 지경이니 사람처럼 살자는 노동자들의 주장에 저러다 왕국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걱정한다.

우리는 왕정국가의 신민인가, 아니면 공화국의 공화주의자인가? 이럴 바에야 차라리 그냥 복벽하자. 이승기 같은 멋진 황제가 등장해 불의를 일삼는 돈과 욕망의 화신들과 싸워준다면 나도 복벽주의자가 되겠다. 하지만 이승기 같은 황제를 찾는 일이 그리 만만치 않아 보인다. 그럼 문제는 다시 공화정이다. 공화정의 공화주의자로 사는 길을 선택한다면 왕정국가의 허상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깨어나자. 신탁을 받아 권력의 절대성을 주장하며, 심지어 가끔 등장해 신민들의 우매함을 꾸짖는 저들만의 왕정국가를 거부하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우리는 바로 그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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