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구르트와 김치

2014.12.08 20:50 입력 2014.12.08 21:15 수정
이효재 | 보자기 예술가

어른이 되면 꼭 하고 싶은 게 있었다. 요구르트 병을 크게 만드는 거였다. 톱니처럼 물려있는 뚜껑을 손톱으로 잘 벗겨서 고개를 젖히고 한 모금 마셨을 때의 감동이란! 그간의 익숙한 맛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좀 오래 벌컥벌컥 음미하고 싶었다. 그런데 두 모금 마시면 끝이었다.

[문화와 삶]요구르트와 김치

“이럴 순 없어, 내가 꼭 우유병만큼 크게 키울 거야. 아니면 세 병을 한꺼번에 마시겠어.” 병이 작아도 너무 작아 투덜대는 동안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수많은 새로운 맛들이 다가왔다. 피자, 스파게티, 치즈, 와인…. 그렇지만 내겐 그 어떤 맛도, 뚜껑을 찬찬히 벗기고, 고개를 살짝 젖히고 요구르트 한 모금 마셨을 때의 감동을 채울 수는 없었다. 첫사랑은 오래가는 것이어서, 요구르트를 마시고 나면 빈 병을 버리지 못하고 물로 헹궈낸 다음 주방 창문 가에 나란히 세워둔다. 햇빛 좋은 어느 날 열어둔 창문 바람으로 빈 병이 날아든 것일까. 라면을 끓이려고 열어둔 냄비 속 끓는 물 속에서 두개의 요구르트병이 꼴깍거리며 헤엄치고 있었다. 뜨거운 물 속에서 쪼그라진 작은 병이 어찌나 예쁜지 집게로 꺼내 들고 자세히 들여다봤다. 요건 깜찍해도 너무나 깜찍한 소인국의 요구르트병이 돼 있었다.

묵은김치가 군내가 나기 시작하면 돼지 앞다릿살 숭숭 썰어 찌개 끓이고, 신문지에 둘둘 말아 광 한쪽에 박아두었던 배추 한 통을 꺼내 겉껍질을 삶아데쳐 된장 풀고, 생콩가루 한주먹, 절인 고추 다져서 된장국을 끓인다. 배추 속대는 손으로 죽죽 찢어 젓국 한 수저로 간해 겉절이하고, 한뼘 속대는 도마 위에 놓고 잘근잘근 두드린 다음 메밀가루 물만 묻혀 전을 부친다. 내친김에 다시마, 우엉도 부치고 마지막 속 고갱이는 무와 함께 나박나박 썰어 물김치를 담근다. 개운하게 소금으로만 간하는데 미나리를 손가락 한마디 길이로 썰어 넣으면 초록빛깔이 고추물과 어울린다. 김가루, 볶음깨 듬뿍 넣어 말아먹어도 한끼의 식사가 된다. 비들해진 배추 한통으로 맛있게 요리해서 한상 차려놓고, 배추전 길게 찢어 입안 가득 물고 미나리 뿌리를 물병에 담아 창문 가에 놓으니 저혼자 한 뼘씩 자라난다.

잘 먹고 남은 김치국물을 버리려니 지난가을의 온갖 전설이 따라와 못 버리고 찬밥 한주걱 넣고 전을 부친다. “유월 송화소금 나올 때 됐지요?”라고 전화할 때는 내가 시인이 된 기분이 든다. 유월 송화소금은 해마다 주문해서 쌓아놓고 묵은 소금은 빼쓰고, 젓갈은 강경이 시댁인 친구가 주고, 고춧가루는 영양에 사는 추 여사가 꼭꼭 보내온다. 양이 많아 김장을 하고도 남는 고춧가루는 곱게 빻아 고추장 고춧가루로 준비해 둔다.

계절마다 봄나물 가을송이 큰 살림에 입이 몇이냐며 오는 이, 가는 이 먹이라고 살림을 챙겨주는 사람들. 배추는 고향이 같다고, 빈땅을 일궈서 농사지은 무농약 배추라고 보내준다. 전설에 취해 전을 부치다보면 크기는 제각각 어느새 한채반을 채우고도 넘친다.

전 부치기가 끝날 즈음 창문 가에 키우던 미나리 싹을 가위로 잘라 붉기만한 김치전 위에 펴놓으면 초록숲의 풍경화가 된다. 풍경화가 된 김치전은 채반에 담아 마당 한가운데 돗자리를 펴고 그 위에 갖다 놓는다. 도시락 반찬통에 밥을 담아 양념 숟가락과 이쑤시개 2개를 젓가락이라고 꺼내 놓은 다음 동네아이들을 불러 모은다.

꽥꽥 소리 지르며 모인 꼬맹이들에게 떡집 보자기 하나씩 목에 매준다. 도시락 먹으라고 주면 아이들은 금세 슈퍼맨 배트맨이 되어 집안은 난장판이 된다. 집에서는 아랫집 윗집 눈치 보느라 조용하던 아이들이 새처럼 온갖 소리내어 놀다가 쉬 지쳐있을 때 푹 삶아져 쪼그라진 요구르트병을 꺼내 나눠준다. 아이들은 단숨에 요구르트를 마시고는 꼭 그 병에 채워달라고 보챈다. 작다고 투덜대던 한병에서 세병이 나온다. 한놈 두놈 줄 세우고 빈 병에 채워주다 보면 나는 소인국의 걸리버가 되어있다. 그것도 맘 좋은 할머니가 되어!

그래, 세상은 꿈꾸는 대로 살아지는 거야. 애써 작은 병을 우유병만큼 키우지 않아도…. 어느 날 부엌 창문 가를 지나는 바람이 묻혀있던 소원을 이루게 해줬잖아. 불어라 바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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