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의 즐거움

2014.12.09 21:22 입력 2014.12.09 21:23 수정
김진송 | 목수·문화평론가

상상과 공상과 몽상은 구분되지 않는다. 굳이 구분하려 한다면, 남이 하면 공상이고 내가 하면 상상이며 꿈인지 생신지 구분하지 못하면 몽상이고 그렇지 않으면 상상이다쯤. 아니면 쓸데없으면 공상이고 쓸 만하면 상상이며 아직 뭔지 모르겠으면 몽상이다, 그쯤? 상상이건 몽상이건 공상이건 이와 가장 잘 어울리는 행동은 게으름이다. 상상의 국가가 있어 헌법을 작성한다면 제1조는 ‘누구나 게으를 권리가 있다’쯤이 아닐까? 게으름과 심심함, 나태와 여유는 상상이 무성히 자라는 들판이다.

[문화와 삶]게으름의 즐거움

아무 할 일도 없이 빈둥거리면 하게 되는 게 상상이지만 상상의 실현은 게으름이 아니라 부지런함 속에서 일어난다. 게으름의 상상일수록 터무니없고 터무니없을수록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부지런을 떨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끔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쓸모없지만 기발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보게 된다. 그런 것들만 골라 상을 주는 이그노빌 대회의 수상자들이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물건들은 정말 쓸모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물건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할 일 없음, 어이없음, 철없음, 무모함을 떠올리다가도 다른 한편으로 놀이, 유희, 쾌락,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두 단어들의 조합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지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게으름은 부지런함의 건너편에 있지만 상상의 세계 속에서 그 둘은 하나일 수 있다. 게으를수록 상상의 폭은 넓어지고 게으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상의 내용은 섬세해지며, 마침내 실현이 가능할 정도의 구체적인 단계에 이르게 되면 생각들이 슬금슬금 머릿속을 기어 나와 손으로 옮겨가는 여정이 남게 된다. 그 뒤로 부지런을 떨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 게으름의 즐거움 속에 말도 안되는 상상을 거쳐 정말 쓸모없는 걸 부지런히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최고의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무한한 게으름이 무한한 상상을 낳는 것은 아니다. 그저 게으름일 뿐인 게으름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평생 빈둥빈둥하는 게으름을 비난할 이유도 없다. 그는 조금 긴 여유를 가지려 할 뿐이다. 여유는 모든 것으로부터 한발 물러나 있는 상태이다.

고향으로 돌아가 빈둥거릴 시간이 없었다면 뉴턴의 만유인력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유는 판단과 가치평가에 대한 일시적 중지를 말한다. 판단 중지는 기존의 모든 것에 대한 해석을 그 자리에 내려놓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여유가 없다면 모든 걸 근본에서부터 바라볼 수 있는 능력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게으름과 심심함, 나태와 여유가 새로운 생각을 낳는 풍요로운 들판인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게으름과 여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먹고사는 문제에 집착해야 하는 일상의 삶에서 게으름은 추방되어야 할 덕목이다. 게으름을 위해서라면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삶의 가치 중 상당 부분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으름이 자발적인 부지런함으로 전환될 수 있다면 그만큼 새로운 가치들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게으름과 심심함이 상상을 시작할 수 있는 조건이지만 고통과 번민과 갈등 역시 상상이 자라는 곳이다. 어쩌면 고통과 번민이 게으름과 여유보다 더 빨리 모든 것에 대한 회의와 의심에 도달하게 할지도 모른다. 판단 중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현실의 고통과 번민을 가져온 핵심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지금 도대체 뭔가는 해야겠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난감한 상황에 빠져 있다면 상상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시간을 갖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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