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아이돌 DNA’

2015.06.22 19:30 입력 2015.06.23 09:08 수정

[경향의 눈]대통령의 ‘아이돌 DNA’

10여년 전 일이다. 서울 여의도의 한 중식당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했다. 박근혜 의원과 광역단체장이던 중진 정치인이 함께한 자리였다. 모임을 마치고 나가는데 젊은 종업원들이 종이와 펜을 든 채 줄지어 있었다. 박 의원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서였다. 광역단체장은 쑥스러운 듯 종업원들 앞을 지나쳐 갔다. 박 의원은 환하게 웃으며 사인을 해줬다. 지난 14일 서울 동대문 밀리오레를 찾은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에서 그날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동대문의 대통령은 그날처럼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박 대통령에겐 ‘아이돌 DNA’가 있다. ‘은둔의 공주’라는 아우라에서 비롯해 충성스러운 팬덤이 떠받쳐온 DNA다. 이 DNA는 대통령이 되기까지 위력적인 무기였다. 손 한번 잡아주면 표가 쌓이는 정치인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대통령이 된 순간, 이런 DNA는 작동을 멈춰야 한다. 대통령은 직무 성격상 아이돌일 수 없다. 팬덤도 잊어야 한다. 찬사와 환호보다 비판과 공격에 익숙해야 하고, 핵심 지지층이 싫어할 결단도 내려야 한다. 그러나 DNA는 변하지 않는다. 집권 3년차의 대통령은 여전히 아이돌이다.

아이돌 스타에겐 어떤 특징이 있나. 팬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위기에 몰리면 침묵하거나 메시지가 불분명한 해명을 내놓는다. 그러곤 대부분 소속사 뒤에 숨는다. 소속사가 보도자료를 내고 사과도 대신한다. 어느 정도 판이 정리되면 아이돌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손편지를 쓰는 식의 ‘소녀 감성’을 선보이며 복귀한다.

메르스 사태에서 박 대통령도 비슷했다. 처음에는 침묵한 채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 뒤에 숨었다. 더 이상 ‘아몰랑’(‘아, 모르겠다’는 뜻의 온라인 용어)하기 어려운 단계에 접어들자 메르스를 언급했다.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 또 국민 불안 속에서 어떻게 확실하게 대처 방안을 마련할지 이런 것을 정부가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6월3일 메르스 대응 민관합동 긴급점검회의).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스스로를 ‘정부’와 분리한 유체이탈식 화법이다. 그러곤 ‘컨트롤타워’는 최경환 국무총리 대행에게 떠넘겼다(6월8일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 브리핑).

미국 방문을 연기한 것은 대통령의 정치문법에 비춰 이례적이었지만, 본질적 변화는 없었다. 당초 출국 예정일이었던 14일 오후, 대통령은 동대문에 갔다. 이날 오전 11시 현재 메르스 확진자는 145명, 사망자는 14명, 격리자는 4856명이었다. 삼성서울병원이 통제불능을 자인하고 부분폐쇄에 들어간 날이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그러나 팬미팅에 온 듯 행복해 보였다. 청와대 대변인은 “시민들이 ‘대통령 파이팅, 힘내세요’ 등을 외치며 몰려드는 탓에 근접 경호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애를 먹기도…” 같은 브리핑으로 ‘소속사 홍보담당자’ 노릇에 충실했다. 대통령은 머리핀과 머리끈, 원피스를 구입했고 네잎 클로버 브로치도 선물받았다. 다음날 대통령은 옷에 달고 나온 네잎 클로버를 매만지며 소녀처럼 말했다. “저에게 힘내라고 응원하는 분들을 보면서 희망을 봤습니다.”

시민은 지금 헌정 사상 초유의 ‘아이돌 대통령’을 목도하고 있다. 특히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생계형 아이돌’이 아니라는 데 유의해야 한다. 박 대통령은 해외순방 같은 의전에 강하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엔 익숙지 않다. 메르스 대란에서 당황스러워한 것은 당연하다. “손 씻기만 실천하면 ‘중동식 독감’은 무서워할 필요 없다”며 ‘정신승리’를 외치더니, 조선시대로 돌아간 듯 ‘친국(親鞫·임금이 죄인을 직접 국문함)’에 나서기도 했다. 90도로 허리 굽혀 사과하는 삼성서울병원장을 보며 대통령은 안도했을 법하다. ‘역시 국가가 뚫린 게 아니야.’ 대통령은 때맞춰 믿음직한 ‘매니저’도 신규 채용했다. 황교안 총리다. 인준 다음날 그는 “초기 대응에 미진했던 점에 대해 송구하다”며 사과했다. 충성심은 갸륵하나, 취임한 지 24시간도 안된 총리가 왜 초기 대응 문제를 사과하는가.

박근혜 대통령이 21일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가뭄 피해 지역을 방문해 소방대원 및 군 장병들과 함께 급수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21일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가뭄 피해 지역을 방문해 소방대원 및 군 장병들과 함께 급수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 19일 공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 박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29%를 기록했다. 박 대통령의 고정 지지층은 30%라는 게 통설이다.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졌다는 건 단단하던 팬덤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열성 팬 사이에서도 ‘데뷔한 지가 언젠데, 왜 노래 실력이 늘지 않는 거야?’ 같은 실망감이 확산되고 있다는 뜻이다. 위기의 아이돌이 인기를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루하고 고통스럽더라도 기본기부터 다시 철저히 다져야 한다. 물론 스스로 해야 한다. 소속사 대표나 매니저가 대신해줄 수 없다. 노래 연습이 힘들다고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 어설픈 개인기를 선보이는 식으로도 안된다. 소방 호스로 논에 물 뿌리는 퍼포먼스 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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