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원·도우미…국정원 판타지 변천사

2018.10.25 20:43 입력 2018.10.25 20:45 수정

MBC <내 뒤에 테리우스>의 한 장면.

MBC <내 뒤에 테리우스>의 한 장면.

현재 TV 수목드라마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는 MBC <내 뒤에 테리우스>는 은둔 중인 전직 국가정보원 요원 이야기로 시작한다. 코드네임 테리우스(소지섭)는 과거 남북이 비밀리에 합의한 망명 작전을 수행하던 중 정체 모를 저격수에 의해 정보원을 잃고 자신 또한 내부 첩자 혐의로 쫓기게 된다. 3년 뒤, 김본이라는 이름의 평범한 남자로 위장해 홀로 저격 사건을 조사하던 그는 자신이 추적 중인 킬러가 무슨 이유에선지 앞집 여자 고애린(정인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김본은 킬러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베이비시터를 자원해 고애린에게 접근한다.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요원·도우미…국정원 판타지 변천사

전설의 블랙 요원이 여섯 살 쌍둥이 남매의 베이비시터에 도전한다는 설정은 단순한 코미디를 넘어 국정원의 위상이 바닥으로 추락한 현실에 대한 풍자적 성격을 띠고 있어 꽤 흥미롭다. 과거 드라마 속에서 미화된 국정원 묘사와 비교해보면 더 온도차가 뚜렷하다. 공포의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 시절을 거쳐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개명한 국정원은 정치적 중립화라는 시대적 요구가 거세지면서 이미지 변신을 위해 대중문화를 적극 공략했다.

2005년 영화 <태풍>을 통해 처음으로 대중매체에 문호를 개방했고, 2007년에는 드라마 최초로 MBC <에어시티>에 촬영을 지원했다. <에어시티>에서 인천공항 담당 요원으로 등장한 이정재와 같은 해 방영한 MBC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언더커버 요원으로 출연한 이준기의 멋진 모습은 국정원에 미국드라마 속 CIA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첩보 조직 이미지를 심는 데 한몫했다.

국정원 판타지는 2009년 KBS가 방영한 <아이리스>에서 극에 달한다. 국정원을 모델로 한 국가안전국 소속 요원들이 한반도 핵 테러를 막기 위해 활약하는 이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35%를 넘어서며 화제를 일으켰고, 국정원은 이병헌, 김태희 등 주연배우 5인에게 명예요원증을 선사하기까지 했다. 같은 해 국정원 요원들을 주인공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7급 공무원>이 400만 관객 이상을 동원했고, 2010년 정우성, 수애가 국정원 특수요원으로 출연한 SBS 드라마 <아테나: 전쟁의 여신>이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이 같은 판타지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드라마 속 국정원에 대한 판타지가 절정을 향해 가던 시기에 정작 현실 속의 국정원은 다시 과거로 퇴행했다는 단서들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10년 프랭크 라뤼 유엔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 미행 탄로 사건, 2011년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 숙소 잠입 발각 사건,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댓글 여론조작과 국정원 직원 감금 사건, 2013년 진보 성향 시민단체 간부를 미행하다 발각된 사건 등 허술한 작전 수행력과 불법 정치 개입이 들통난 굵직한 사례가 줄을 이었다.

자연스럽게 드라마 속 국정원 판타지도 힘을 잃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전작의 영광을 이어가려던 2013년 KBS <아이리스2>와 리메이크 드라마인 MBC <7급 공무원>은 동시간대에 경쟁을 펼쳤으나 국정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SBS <그 겨울, 바람이 분다>가 시청률 1위를 가져갔다. 이후 한동안 TV 드라마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국정원 캐릭터는 2017년 미국드라마를 리메이크한 tvN <크리미널 마인드>에 다시 등장했으나 그 결과는 더욱 처참했다. 2016년 말 국정농단 사건 이후 대표적인 ‘적폐 집단’으로 꼽힌 국정원을 액션 영웅물의 무대로 소비하려는 시청자는 거의 없었다.

<내 뒤에 테리우스>는 이 같은 시대착오적 전철을 밟지 않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오히려 시대적 맥락을 영리하게 이용해 그동안의 국정원 판타지를 코미디로 비튼다. 드라마 속에서 국정원은 대놓고 “온 국민으로부터 매일 욕먹는 게 일인” 집단으로 묘사된다. 주인공 김본은 멋지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전설이고 그의 특수한 능력은 고된 육아에는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여섯 살 쌍둥이 남매의 체력을 따라잡지 못하고, 갑자기 초저녁만 되면 왜 잠이 쏟아지는지 어리둥절해하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국정원의 무능함이 그들보다 뛰어난 정보력을 지닌 킹캐슬 아파트 아줌마 정보국, 일명 KSI의 비교를 통해 두드러질 때다. 3회에서 국정원의 김본 추격전과 KSI의 쌍둥이 남매 유괴 저지 작전을 병행편집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국정원은 화려한 장비와 기술과 대대적 인력을 동원하고도 김본을 잡는 데 실패하지만, KSI는 주부들의 단체 메신저방을 활용해 결국 유괴범을 찾아낸다. 국정원 요원들이 결정적 고비마다 현장에 나타나 활약하는 KSI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국정원이 그들만의 게임을 벌이는 동안 민생과 얼마나 멀어졌는지에 관한 풍자이기도 하다.

국정원 소재 작품은 내년에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장르물로는 첩보가 여전히 매력적인 소재인 데다 급변하는 남북관계로 인해 그 중요성도 한층 커졌기 때문이다.

현재 이승기, 수지 주연의 <배가본드>, 제작비 250억원대 대작으로 알려진 <프로메테우스> 등이 제작 중이다. <내 뒤에 테리우스>가 국정원 판타지를 역으로 이용해 성공했다면, 블록버스터를 표방하는 다른 첩보물들은 어떤 전략을 선택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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