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법 놀이

2019.10.27 20:56 입력 2019.11.19 14:56 수정

직업이 출판사 대표요, 수십년을 편집 일에 종사하다보니 맞춤법, 외래어 표기, 띄어쓰기에 유독 민감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길거리나 TV에서 맞춤법에 맞지 않은 걸 보는 게 일상이기에 조용히 원고의 틀린 철자는 고칠지언정 남의 맞춤법 오류를 지적하는 일은 거의 없다. 노래방에서 노래는 안 부르고 가사 틀린 것을 고치고 앉아 있다는 편집자들 얘기도 이제는 식상하다. 오히려 맞춤법이나 외래어 표기의 오류를 지적하려다가도, 모종의 지적 우월의식이나 전문가주의가 내게 숨어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다.

[산책자]맞춤법 놀이

아내는 젊었을 적 영어권 국가에 잠깐 유학했을 때 현지 이름으로 ‘수잔’을 썼다고 한다. 천주교 세례명이 ‘수산나’여서 그런 이름을 쓴 것인데, 문제는 영문 표기를 ‘Sujanne’으로 썼다는 것이다. 한글에서는 수전, 수잰, 수잔, 무엇을 쓰든 다 같은 이름인데, 영어에서 ㅈ을 s가 아닌 j로 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나는 또 편집자병을 버리지 못하고 지적했다. “영어에서 s와 z는 서로 통하는 음가를 가지고 있지만, j는 완전히 다른 발음이에요. 수산나를 ‘Susan’이나 ‘Suzanne’으로 쓸 수는 있지만 ‘Sujanne’으로 쓰면 아예 다른 이름이 된다고.” 아내는 벌컥 화를 내면서, 현지 영어선생이 그렇게 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반박했다. 나는 속으로 ‘그 사람들이야 자기 이름 제 맘대로 쓴다는데, 그런 개인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지 표기가 옳다는 건 아닐걸?’ 하고 생각했지만, 논쟁이 커질 것 같아 억울한 마음을 꿀꺽 삼켰다. 결혼 당시 아내가 타던 소형차 뒷문에도 ‘Sujanne’이라는 스티커가 떡하니 붙어 있었는데, 나는 몇 번이나 손톱으로 j를 만지작거리다가 아내가 경을 칠까 봐 떼지 못했다. 이후로도 스티커를 볼 때마다 끙끙 앓았지만.

사람들에게 이 일화를 들려주자 난리가 났다. 한 사람은 자신의 성 ‘부’를 ‘Poo’로 표기한 바람에 보는 사람마다 괴로워한다고 했다. 곰돌이와 일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누군가 ‘Bu’로 써야 한다고 하자, 그러면 가족이 모이면 ‘Bus’가 되는 거냐는 말에 모두가 웃었다. 다른 친구는 성을 ‘Ahn’으로 안 쓰고 ‘An’으로 표기하는 바람에 자음인 이름 앞에서 잘못 쓴 관사 취급을 받는다고 했다. 또 어떤 친구는 장씨 성을 ‘Jang’으로 썼더니 독일어권에 가서 ‘양’씨가 되고 말았다며 사람들을 웃겼다. 차범근 감독이 ‘Bum’이라는 표기 때문에 독일에서 ‘차붐’으로 불린 것은 이 방면의 전설이라 하겠다. 공을 그렇게 잘 찼으니 ‘붐’으로 불려도 좋지 않았을까?

맞춤법 혹은 외래어 표기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언어 규범주의와 실용주의의 오랜 대립에까지 이르게 된다. 의사소통의 일관성과 언어생활의 일치 또는 학술적 정확성을 위해서 우리말에 표준어와 맞춤법이 꼭 필요하다는 주장이 언어 규범주의 또는 순혈주의의 입장이다. 반면, 끊임없이 변하는 언중의 언어생활을 일관성도 없는 규범으로 강제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합의에 맡겨야 한다는 언어 민주주의적 주장이 실용주의의 입장을 이룬다. 여기서 민주주의라는 말을 썼다 해서 실용주의가 반드시 옳다는 건 아니다.

최근에 출간된 변정수 출판평론가의 <한판 붙자! 맞춤법>은 이런 언어 순혈주의와 실용주의의 어느 한 편을 택하는 책이 아니어서 반가웠다. 저자는 맞춤법의 강제 규정이 확대되어 언어 정보에 불과한 표준어까지 강제 규정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표준어보다 ‘공통어’로 우리의 언어적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행 규범이 만들어진 취지를 이해하는 게 우선이고,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규범의 강박에서 벗어나 의사전달의 효율성과 표현의 적절성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가령 외래어표기법이 현지 발음과 얼마나 비슷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끼리 소통하기 위한 약속임을 안다면 ‘어륀지’나 ‘오렌지’나 무엇이 문제일까. 책에는 이 밖에도 우리말의 성립과 쓰임에 관한 심도 있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한글날이 지난 지도 오래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른바 ‘조국 사태’ 앞에서 무슨 한가한 글로 지면을 낭비하느냐는 말이 귀에 따갑게 들리는 듯하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법이나 규정이나 제도가 무슨 상관인가. 거리의 사람들에게 귀 기울여야 한다. 아내의 틀린 철자에도 수산나 세례명을 꼭 쓰고 싶은 아름다운 의도가 숨어 있듯이, 거리의 목소리들에도 뭔가 사람들의 염원이 있는 것이다. 그 ‘공통어’를 찾아나가는 것이 정치의 일이요, 언론의 일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어느 쪽에도 서지 못한 자의 참 한가한 얘기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