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민주주의

2024.03.14 20:17 입력 2024.03.14 20:24 수정

2024년 봄, 풍경 하나. “선생님에게 여러분을 알려주세요.” 새 학기가 시작된 초등학교, 가정통신문을 보내온다.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니 안심하고 솔직하게 적어달라고 한다. 여러 정보를 적게 되어 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장래 희망. 학생과 학부모가 따로 적게 되어 있다. 한 아파트에서 주민들이 모여 자녀의 장래 희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 애는 강시예요. 애니메이션 <신비아파트> 아시죠? 거기 나오는 귀신 캐릭터 때문인 거 같아요.” “공룡이 되고 싶대요. <고고다이노> 로봇 공룡을 보고 그런 거 같아요.” 학부모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린다. 근데 한 학부모가 적은 아이의 장래 희망을 보고 모두 웃음을 멈춘다. ‘검사!’ “대통령이 되려면 먼저 검사가 되어야죠.” 장난기가 반쯤 섞인 말이지만, 모두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2024년 봄, 다른 풍경 하나.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자유주의가 민주주의 대신 당시 세계사의 보편적 흐름으로 추앙된다. “기미독립선언의 뿌리에는 당시 세계사의 큰 흐름인 ‘자유주의’가 있었습니다.” 자유주의가 전체주의 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부정적 준거로 해서 정의된다. “독립과 동시에 북녘땅 반쪽을 공산전체주의에 빼앗겼고, 참혹한 전쟁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시련도 자유와 번영을 향한 우리의 도전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자유주의의 뜻이 일본과 가치를 공유한다는 진영만의 것으로 쪼그라든다. “지금 한·일 양국은 아픈 과거를 딛고 ‘새 세상’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자유, 인권, 법치의 가치를 공유하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2024년 봄, 또 다른 풍경 하나. 한 회사가 사내 공지를 통해 <건국전쟁> 영화를 관람하면 1인당 5만원의 지원비를 지급한다고 공지한다. 공산주의 독재 국가에 맞서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한 이승만 대통령의 땀과 눈물, 투쟁을 조명한 작품이라는 소개가 붙어 있다. 자유 민주주의의 기원과 의미를 1948년 대한민국 ‘건국’에 고착시킨다. 전체주의 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김일성을 건국의 아버지로 내세우듯, 이제 이승만을 자유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국부로 옹립하고자 한다. 문제는 이 국부가 국가권력을 절대적으로 휘두른 독재자란 사실. 국가주의에 종속된 자유주의가 온전한 자유주의일 리 없다.

자유주의를 사유한 대표적인 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자유를 둘로 나눈다. 먼저, ‘소극적 자유.’ 행위자가 자신의 목적이나 의도를 발휘하지 못하도록 타자가 가하는 구속에서 벗어난다. 이를 위해서는 행위의 궁극적인 정당성의 준거를 자신에서 찾는 개인주의가 발달해야 한다. 다음으로, ‘적극적 자유.’ 행위자가 자신이 의지하는 목표를 추구하고 성취할 수 있는 역량이다. 자신의 행위를 더 큰 타자를 통해 자율적으로 조절할 줄 안다. 이는 단 하나의 보편적 ‘일반의지’가 지배하는 국가주의에서는 절대로 실현될 수 없다. ‘자율적 시민이 만든 보편적 연대,’ 즉 민주주의에서만 가능하다.

민주주의는 지구상의 모든 문명이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서로 교류하며 함께 가꿔온 초월적 가치이자 현실적 제도다. 민주주의 안에는 이미 자유주의가 전제되어 있다.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기껏 3대 세습 독재 국가를 준거로 삼아 부정적으로 초라하게 정의하면 안 된다. 좁은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넓은 문명사적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보아야 한다. K-wave가 전 세계에 힘을 발휘하는 2024년 봄, 대한민국이 오롯이 자랑할 것은 제국주의와 독재를 뚫고 우뚝 선 ‘K민주주의!’ 국가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암울한 현실, 전 세계 공중이 K민주주의를 보며 희망의 불꽃을 되살리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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