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누구의 것인가?

2020.05.03 20:41 입력 2020.05.03 20:47 수정

전 국민 대상의 긴급재난지원금이 결정된 후 3차 추경을 통한 ‘한국형 뉴딜’이 발표되자, 기획재정부는 곧바로 ‘원격의료’를 들고나왔다. 코로나19와 원격의료가 도무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두가 궁금해할 때, 한 언론이 찾은 것은 장관의 ‘개인적 관심’이었다.

“원격의료는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숙원사업이기도 하다. 홍 부총리가 기재부 국장 시절 주도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원격의료 이슈로 발목이 잡혀 9년째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연합뉴스)

[지금, 여기]국가는 누구의 것인가?

한국이 과감하고 선제적인 방역으로 세계적 모델이 되고 있는 사이에, 경제대응은 소극적이고 느려 터졌다는 지적은 이제 식상할 정도다. 긴급재난지원금에 대한 여야 정치권과 지방정부의 줄기찬 문제제기, 청와대의 거듭된 재고 요청에도 기재부는 70% 주장을 꺾지 않았다. 심지어 다시 이런 상황이 와도 전 국민 지급에는 동의하지 않겠다는 고집을 당당히 과시했다. ‘국가부채비율 40%’라는 기준이 경제학 이론에서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 없고, 다만 기재부가 자체적으로 주장하는 ‘심리적 마지노선’에 불과하다는 것도 이제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 정도면 기재부가 ‘나라는 우리가 다스린다’는 자신감, 그리고 거기에 도전하는 어떤 권력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오만함을 충분히 보여준 셈이다. 누군가가 국민에 의해 선거로 선출되어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한 상황에서도 제 고집대로만 나라를 통치할 수는 없다. 하물며 관료는 말할 것도 없다. 관료가 실질적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관료지배라고 할 뿐, 민주주의라고 부르지 않는다.

2016년 촛불은 국민주권을 실현시킨 사건이었다. 헌법에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되어 있지만, 로크의 아픈 지적대로 우리 국민은 몇 년에 한번 선거에 참여할 권리만 가질 뿐 주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2016년, 국민은 스스로 선출한 권력을 스스로 끌어내림으로써 헌법을 구현했다. 소수 엘리트가 독점했던 ‘정치주권’을 되찾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제주권은 어디에 있는가? 그동안 우리 경제주권은 소수의 경제관료에게 있었다. 그런 경제관료 입장에서 지난 두 달 동안 긴급재난지원금이 결정되는 과정은 수치스럽고 어리둥절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재난소득에 대해 기재부가 안된다고 하고, 보수언론이 포퓰리즘이라고 하면, 국민들이 금세 고개를 끄덕이고 안된다고 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촛불로 정치주권을 찾아온 국민들이 이제 경제주권을 찾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곳간지기가 곳간주인 노릇 하던 시대는 지났다. 나라의 주인이 전문성을 갖추지 못해 곳간지기가 곳간주인 노릇까지 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정치권력을 대통령과 한줌의 권력이 맘대로 주무를 수 있는 시대가 지난 것처럼, 경제권력을 경제관료가 독점하던 때도 지났다. 총선 결과를 보면서도 기재부는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이번 코로나19 대응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은 사람에 대한 믿음과 연대, 공동체성이 가진 힘이었다. 거기서 교훈을 얻었다면, 한국형 뉴딜의 문을 열면서 공공의료 뉴딜, 그린 뉴딜, 산업안전 뉴딜, 사회보험 뉴딜을 제시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기재부가 가져온 것은 원격의료 뉴딜, 규제완화 뉴딜이었다. 누구 말마따나 ‘네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안 맞는’ 상황이다.

20세기 후반 유행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사실상 종식시킨 것은 전염병이 초래한 팬데믹이라고 역사엔 기록될 것이다. 이를 통해 인류는 기후변화와 인간존엄, 공동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 이 기회를 틈 타 기재부가 하고 싶은 건 ‘컨택트 신자유주의’에서 ‘언택트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이었나 보다. 과거라면 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기재부가 빨리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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