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의 단편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있다. 1880년대 봉건 러시아의 가난한 구두장이 세몬이 아내 마트료나 및 아이들과 함께 사는데, 우연히 벌거벗은 나그네 미하일을 만난다. 이들은 없는 살림에도 서로를 보살피며 약 7년간 구두 가게를 꾸린다. 그간 크게 두 가지 일이 생긴다. 하나는 거구의 부자 신사가 1년 이상 신을 독일제 가죽장화를 주문한 일. 둘째는 정숙한 부인 마리아가 일곱 살배기 쌍둥이 여아들을 위해 봄맞이 구두를 주문한 것. 그런데 묘한 반전이 있다. 알고 보니, 미하일은 원래 천사였다. 하나님 명령 불복종으로 세가지 질문에 답을 찾는 중이었다. 첫째, 사람에게 있는 건 뭔가? 둘째, 사람에게 없는 건 뭔가? 셋째, 사람은 무엇으로 사나? 처음과 끝의 답은 사랑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환대하기다. 쪼들리게 가난한 마트료나가 불청객 미하일에게 숙식을 베푼 것도, 마리아가 이웃집 고아 쌍둥이를 키워온 것도 모두, 사랑이었다.

강수돌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교수

강수돌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교수

그 뒤 140년, 우리에겐 ‘자본은 무엇으로 사나?’란 질문이 필요하다. 사실, 톨스토이의 질문들 전에 벌써 마르크스가 이 질문에 답을 내놓았다. 자본은 사람의 ‘산 노동’을 먹고 산다고. 사람의 살아있는 노동, 이것이 상품을 만들고 가치를 만들며 이윤을 만든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면 자본의 목적은 이윤이다. 사람이 진정 행복하면 존재에 감사하고 타인도 배려한다. 그러나 자본의 이윤 추구엔 만족이 없다. 물불 가리지 않고 끝없이 달린다.

그러나 자본은 사람의 산 노동을 ‘강탈’하진 않는다. 등가교환 법칙 아래 시장 교환을 한다. 소위 ‘공정’ 계약! 게다가 자본은 일자리와 소득까지 준다. 또 자본은 ‘괴물’도 아니다. 자본은 경제를 발전시킨 산업건설의 주역이자 재산을 불려주는 마술피리다. 자본은 멋진 자동차요, 고급 명품이다. 그러니, 자본을 “흡혈귀”라 하고 인간 노동을 “착취”한다고 하면 대단한 오해요 배은망덕이다…. 과연 그런가?

자본은 사람들이 믿는 ‘신화’를 먹고 산다. 경제성장 신화가 가장 심각하다.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기 때문. 일례로, 강원 삼척시 원덕읍 아름다운 솔섬 근처에 들어선 세계 최대 규모의 액화천연가스(LNG) 생산기지를 보라. 2008년 여름, 약 3조원 규모의 국책사업이 확정되자 월천리 등 주민들은 “취업도, 장사도 잘될 거라”며 기뻐했다. 곧이어 옥원리엔 약 4조원짜리 종합발전소까지 유치됐다. 당국은 이 생산기지 유치로 500여 명의 고용이 창출되고 1500여 명이 새로 유입되는 등 대규모 경제 활성화 효과가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배신당했다. 아름다운 솔섬과 백사장은 사라지고 관광객 발길도 끊겼다. 공기와 건강이 나빠지고 보상 문제로 가족·이웃 간 관계도 망가졌다. 민간·공공 불문, 자본은 사람과 자연의 생명을 먹고 산다.

자본은 또한 우리의 탐욕을 먹고 산다. 최근 서울시 그린벨트 논란을 보라. 안 그래도 1000만 밀집 인구가 모여 살기엔 숨쉬기도 어려운 서울, 그린벨트는 사람으로 따지면 마지막 남은 허파의 일부다. 이곳을 무한 이윤을 좇는 건설자본과 그 주변 학자들 연합이 고위층과 민주당을 움직여 개발하려 했다. 이에 60%의 여론이 반대하자 대통령 결단으로 일단 멈췄다. 천만다행이다! 그런데 한사코 개발하자던 27% 집단엔 과연 건설자본과 속물 학자들만 속할까? 개발 이익을 노린 주민이나 그 주변 일반인, 그와 연동된 부동산 종사자, 모두 알고 보면 우리의 이웃이다. 평범한 탐욕이 자본의 먹거리다.

좀 더 깊이 따지면, 자본은 사람들의 두려움, 위기감, 분노, 증오를 먹고 산다. 우리는 이미 내면화한 자본주의 시스템이 망할까봐 무척 두렵다. 위기 극복에도 먼저 나선다. 자본과 권력의 지배 전략엔 무심하나, 알량한 기득권이 침해되면 한사코 분노한다. 우리를 경쟁과 분열의 틀 속에 가둔 구조엔 충성하지만, 주변의 경쟁자는 죽(이)도록 증오한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앞 톨스토이 글에서 거구의 부자는 뜻밖에 일찍 죽는다. 튼실한 구두를 주문하고 돌아가던 길에 마차에서 죽었다. 천사였던 미하일은 이를 미리 알고 ‘엉뚱하게’ 슬리퍼를 제작했다. 그래서 두 번째 물음, 사람에게 ‘없는’ 것이란, 자신의 참 필요를 아는 예지다.

톨스토이는 암시한다. 우리는 부모나 이기심은 없이도 살지만, 인간 사랑, 자연 사랑 없인 못 산다. 봉건시대 톨스토이의 지혜는 140년 뒤 금융·디지털 자본주의가 요란한 지금도, 특히 코로나19 위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자본은 무엇으로 사는가? 다시, 묻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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