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혐오하고 남을 미워하는 ‘당위의 횡포’

2020.07.21 03:00 입력 2020.07.21 03:03 수정

어머니는 늘 늦잠을 잤다. 중개일을 하던 아버지는 출장이 잦았다. 소년을 깨워 등교시켜줄 사람도, 하교하면 반겨줄 사람도 없었다. 정신장애를 앓던 어머니는 자식에게 통 관심이 없었다. 음울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소년은 남달랐다. 용돈을 모아 알람 시계를 샀다. 아침마다 혼자 힘으로 일어났고, 두 동생을 챙겨 학교에 갔다.

이름이 좀 낯설겠지만, 앨버트 앨리스는 저명한 심리학자다. 한때 가장 영향력 있는 정신치료자 순위 2위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3위에 그쳤다. 하지만 금수저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저런 불행이 따라다녔다. 내리사랑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타고난 몸도 약했다. 병치레가 잦았고, 여섯 살 무렵에는 1년 넘게 입원도 했다. 성격도 밝지 않았다. 사람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내성적이었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모든 이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 하고, 다들 나에게 친절하고 공정해야 한다.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있어야, 위험한 일은 피할 수 있어야 한다. 일은 가능한 한 적게 하고, 삶은 쉽고 즐거워야 한다. 누구도 나쁜 짓 하면 안 된다.’

앨리스가 말한 13가지 왜곡된 신념 중 일부다. 다음 두 문장으로 줄일 수 있다. 자신 그리고 타인은 반드시 바람직한 방식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므로 반드시 징벌해야 한다.

‘당위의 횡포(Tyranny of the Should)’를 처음으로 언급한 인물은 정신과 의사 카렌 호나이다. 그의 삶 자체가 자신 그리고 타인이 부여한 당위의 횡포로 가득했다. 소녀 호나이는 거울을 보고, 자기는 좀처럼 사랑받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대신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진학을 두고 아버지와 부딪혔다. 여성의 ‘당위’는 주부였다. 프라이부르크 대학교가 독일 최초로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한 덕에 겨우 의대에 갈 수 있었다.

정직하고, 성실하고, 능력있고, 정숙하고, 깨끗하고, 올바르고, 유쾌하고, 친절하고, 젊고, 사랑스럽고, 예뻐야 한다. 이러한 당위의 횡포 앞에서 우리는 점점 나를 혐오하고, 남을 미워하게 된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다니, 누군가 나쁜 짓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자신이든 타인이든 범인을 찾아 따지고 벌줘야 한다. 매일매일 심판의 날이다. 스스로 피고인석과 원고석에 번갈아 앉는다. 집단 수준에서도 일어난다. 가족이, 회사가, 국가가 당위의 횡포에 시달리는 것이다. ‘세상은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명제 앞에서는 그 누구도 유죄 평결을 피할 수 없다.

앨리스는 좀처럼 이성교제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변머리 없는 자신을 탓하거나 콧대 높은 여성을 탓하지 않았다. 대학 졸업반 무렵, 브롱크스 식물원에서 무려 한 달 동안 총 130명의 여성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129명이 거절했다. 단 한 명이 데이트 신청을 수락했는데, 막상 약속 장소에 나타나진 않았다. 하지만 앨리스는 ‘타인이 반드시 자신에게 친절해야 하고, 자신은 무조건 사랑받아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교정할 수 있었다. 거절의 경험은 그리 비참하지 않았고, 대화는 즐거웠고, 어쨌든 삶은 계속되었다.

고통과 불행을 맞닥뜨릴 때마다, 우리는 어떤 당위가 깨진 것인지부터 찾는다. 자신이든 세상이든 ‘똑바로’ 되어만 있었다면, 분명 그 결과도 좋았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다. 도대체 뭐가 ‘똑바로’인가? 설령 모든 게 ‘똑바로’ 되어 있었다고 해도, 본디 일이란 기대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만약 바라는 대로 된다면, 점점 더한 것을 바랄 것이다. 도돌이표다.

도저히 포기하지 못할 당위가 있는가? 그래서 ‘못난’ 자신에게 한숨 짓고, ‘글러먹은’ 세상을 향해 삿대질을 하는가? 사람에 따라,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들쑥날쑥한 것이 바로 잘난 당위의 실체다. 폭군에게 내맡겨둔 삶의 키를 용감하게 다시 움켜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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