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 공개, 늦으면 세상이 끝나나

2020.07.24 03:00 입력 2020.07.24 03:05 수정

매년 10월 첫째 월요일, 노벨상 발표를 시작으로 스웨덴 전체가 기분 좋게 들썩인다. 2018년은 달랐다. 수상자보다 더 주목받은 뉴스가 있었다. 노벨위원의 남편이자 문화계 유력 인사의 강간 유죄 판결이 난 날이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그 전해로 넘어간다.

하수정 북유럽연구소 소장

하수정 북유럽연구소 소장

2017년은 스웨덴에서 ‘미투’의 해로 기억된다. 미투 해시태그(#MeToo)를 걸고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그해 말부터 사회 각 분야로 번졌다. 여성들은 직군별로 피해사례를 수집했다. 스웨덴 국왕까지 미투 운동 지지를 선언했다.

그중 스웨덴 사회를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한 여성이 6년 전 문화계 유력인사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고백한 것이다. 해당 증언은 곧바로 당시 피해사실을 들었거나 비슷한 경험을 한 여러 사람에 의해 확인되었다. 뒤이어 무려 18명이 같은 인물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유력 일간지 다겐스 뉘헤테르를 통해 고백했다. 신문은 피해자의 고백이 믿을 만한지 다각도로 확인했고 진실이라는 확신이 든 후에 기사로 내보냈다.

피해자의 경우 본인의 의사에 따라 실명을, 때로는 얼굴까지 공개한 이도 있고, 밝히지 않은 이도 있다. 반면 기사 어디에도 가해자로 지목된 이의 이름이 없었다. 신문, TV, 라디오 할 것 없이 피의자는 줄곧 “문화계 인사(Kulturprofil)”로 불렸다. 간혹 “문화계 핵심 인사” “한림원 회원과 밀접 관계”라는 설명이 붙었지만 다른 개인정보는 일절 없었다.

요즘은 뉴스가 실시간으로 나온다. 어느 한 곳에서 특종을 터뜨리면 다른 곳에서 곧 ‘받아쓰는’ 것이 한국의 뉴스 제작 풍토다. 하지만 스웨덴의 경우 같은 사안이라도 매체마다 가이드라인이 달라 공개 범위와 시기가 다르다.

문화계 인사 성폭력 사건의 경우 업계 누구라도 알 만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이름이 언론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첫 기사가 난 지 6개월이 지난 후였다. 2018년 6월 검사가 해당 인물을 기소한 후에야 ‘아프톤블라뎃’ 같은 대중지가 피의자의 이름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공영방송 등 권위 있는 매체는 10월1일 법원 판결이 난 후에야 실명을 쓰기 시작했다. 몇몇 온라인 매체는 먼저 썼지만 대다수 언론은 기다렸다. 언제 실명을 쓰기 시작했느냐가 정론지와 황색언론을 가르는 기준 같았다.

다겐스 뉘헤테르 기자로 일하는 친구에게 물으니 “시민의 알권리도 중요하지만 시급을 다투는 일이 아니라면 피의자가 공정한 재판을 받도록, 무고한 개인의 인권에 무게를 둔다”며 “언론이 용의자의 이름을 먼저 밝히면 오히려 독자와 시청자가 나서 기사가 비윤리적이라 지적한다”고 했다. 2020년 스웨덴 신뢰도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4%가 공영방송을, 45%가 다겐스 뉘헤테르를 신뢰한다고 답했다. 한국의 뉴스 신뢰도는 21%, 조사 대상 40개국 중 40위다.

스웨덴 언론이 몰라서 쓰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고소인이건, 피고소인이건 판결이 나기 전까지 무죄로 추정받을 자연인으로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다. 사실관계가 확인되기도 전에 여론재판으로 누군가의 삶이 망가지는 일을 우리는 너무 자주 봐왔다. 한국 기자의 펜은 살인면허와 같다.

대한민국 뉴스에 기본적 합의가 사라진 지 오래다. 사안이 담고 있는 가치, 대상을 대하는 태도, 출처의 신뢰성, 양쪽의 의견을 전하는 균형감으로 사회적 담론을 형성할 풍토를 마련해줘야 할 언론이 자기 확신에 찬 소리를 먼저 낸다. 표적을 세워 분노하라 부추기고 극단으로 몰아붙인다. 진실 경쟁이 아닌 속보 경쟁에 매달려 같은 얘기만 쓴다. 입맛대로 취사선택하면서 실수를 인정하는 데는 인색하다.

언론이 갖고 있는 무서운 힘,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는 기사의 힘을 대한민국 기자들은 권력으로 여길까, 두려움으로 여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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