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시민’의 새로운 서사

2021.08.05 03:00 입력 2021.08.05 03:04 수정

“아름다운 것들은/ 땅에 있다// 시인들이여// 호박순 하나/ 걸 수 없는/ 허공을 파지 말라// 땅을 파라.” 이순을 훌쩍 넘겨 첫 시집 <새들은 날기 위해 울음마저 버린다>를 출간한 김용만 시인의 ‘시인’이라는 작품이다. 일체의 분식을 생략하면서 나르시시즘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담담한 태도가 퍽 인상적이다. “호박순 하나”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농업, 농촌, 농민의 삶을 온전히 껴안으려는 시인의 태도가 잘 느껴진다. “높은 산 보고/ 낮게 사는 법”(‘산중 풍경’)을 배운 사람 특유의 당당한 겸손의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고영직 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자신의 내력을 기록한 시 ‘귀향’ 등에 따르면, 김용만 시인은 “삼십 년 눈먼 용접사”로 살았다. 노동자 시 모임 ‘일과시’ 동인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다 위암 판정을 받았고, 전북 완주의 한 산골마을로 ‘귀향’했다. 이쯤 되면 어느 방송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에 등장하는 출연자들의 사연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시인의 귀촌살이는 세상으로부터 퇴각한 것도 아니고, 고상한 탈속 취미는 더더욱 아니다.

시인의 시와 삶은 50+ 신중년 및 노년기에 누구나 직면하게 되는 퇴직과 질병 같은 ‘상실’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삶의 전환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환기한다. 미국 작가 리베카 솔닛이 언급한 ‘외상후성장’이라는 말은 적절한 참조점이 된다. 외상후성장이란 트라우마적 상황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진화하며 좋은 삶을 살고자 하고, 좋은 사회로 전환하고자 하는 지향이다. 그런데 누구나 겪게 되는 상실의 시간을 슬기롭게 수용하지 못한다면, 신중년 및 노년은 ‘허무함, 지루함, 비루함’의 3종 세트에 묶여 지내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삶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탄생할 수 없다.

새로 쓰는 노년학개론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이듦 수업을 지원하는 정책 또한 요청된다. 우리는 100세 시대를 의미하는 호모 헌드레드 시대에 살고 있다. 평균 기대수명 65세 시대의 노년학개론으로 지금의 신중년 및 노년 세대의 생애주기별 ‘나이듦 수업’을 포괄할 수는 없다. 호모 헌드레드 시대 노년의, 노년을 위한, 노년에 의한 새로운 노년학개론이 요청된다. 개인의 진실을 강변하고 강요하려는 태도와 습관이 아니라,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고, 누구와 만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나이듦 수업이 되어야 한다.

최근 60+책의해추진단이 출범했다. 한국노년학회와 손잡고 ‘나이가 들다, 독서가 늘다’를 표방하며 ‘60+책의해’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독서 활동으로 노년의 활력과 삶의 질이 높아지는 사회, 책으로 세대 간 공감과 소통이 확장되는 사회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9월부터는 ‘행BOOK학교’가 시작된다. 신중년 및 노년 세대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염탐’하는 충만한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나라 걱정 대신에 ‘사람 걱정’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후배 세대들에게 어깨를 빌려주고 길을 내줄 줄 아는 ‘선배시민’은 그런 고독한 시간에 탄생하는 것이리라. 나는 김용만 시인이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 울어주는 일”(‘오늘은 누구라도 볼 수 있을까’)이라고 한 표현에서 그런 선배시민의 마음을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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