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도 나중에 하겠습니다

2021.11.30 03:00 입력 2021.11.30 03:04 수정
장은교 소통·젠더데스크

꾸중을 들을 게 뻔하지만 밝히고 싶다. 나는 내년 대선 때 기권하기로 마음먹었다.

투표권이 생긴 이후로 꾸준히 선거에 참여했다. 찍고 싶은 후보가 명확한 적도 있었고, 당을 보고 찍은 적도 있었다. 당선 가능성은 적지만 지지하는 마음을 보태고 싶어 투표한 적도 있다. 점점 더 선택하기가 참 어렵구나 싶었지만 인생이 원래 그런 것 아니겠냐고, 완벽히 마음에 드는 선택지 같은 건 없는 것이라고 다독였다. 투표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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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지? 왜 그래야 하지?’ 하는 마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정답이라고 하기 어려운 보기만 주어진 객관식 시험에서 어떻게 답을 고르라는 걸까? 시험을 거부할 권리는 없는 것인가? 정답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답을 적어낸 뒤 괴로운 것과 시험 자체를 포기하며 느끼는 자책감 중 어느 쪽이 더 클까?

내가 투표하지 않을 용기(?)를 갖게 된 것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덕분이다. 지난 9일 양당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힘을 합쳐 차별금지법 심사를 2024년 5월29일까지로 미뤘다. 차별금지법은 2007년부터 7차례 의원발의됐지만 법사위 문턱도 넘지 못했다. 이번엔 국민동의청원에 10만명 이상이 모이는 노력 끝에 법사위에 회부됐지만 양당이 법안 심사를 ‘나중’으로 미뤄버리는 데 고작 43초가 걸렸다. 아하, 차별금지법 나중에… 그렇다면 투표도 나중에 해도 되는 것 아닐까.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12월4일 “‘나중에’ 살 수 없는 사람들 모이자”라는 주제로 집회를 개최한다.) 정치인들이 할 일을 나중에 하겠다는데, 그럼 유권자인 나도 나중에 하지 뭐.

“나중에”를 외치는 순간은 매일 찾아오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가 살인사건을 ‘데이트폭력’이라고 했을 때도 “맙소사… 나중에”. 그 살인사건을 변호한 입장을 물은 질문에 첫 대답이 사죄가 아니라 “변호사라서 변호했고요”라는 것을 보면서도 “그래… 나중에”.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선거 때가 되니까 또 슬슬 이런저런 범죄를 페미니즘과 엮는 시도가 시작되고 있다”고 한 것을 보며 “아이고… 나중에”. 지난 8월 “페미니즘이 정치적으로 악용돼 남녀 간 건전한 교제를 막는다”고 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젠더살인사건에서 ‘젠더’ 얘기는 쏙 빼고 “정부 무능 탓”이라고만 한 것을 볼 때도 “그럼 그렇지… 나중에”.

대선까지는 99일이 남았다. 그동안 기권하겠다는 마음은 변하게 될까. 당선 가능성은 적지만 그나마 상식적인 행보를 하는 다른 후보에게라도 표를 던지게 될까. 혹시 유력한 두 후보와 거대정당이 깨치고 달라져서 ‘나중’을 좀 앞당겨줄 순 없을까. 여성학 연구자 권김현영의 책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엔 이런 글이 담겼다. 선거와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마음이 산란할 때 힘이 되어 소개한다. “페미니즘의 목표는 권력을 남성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권력에서 폭력을 제거하고 권력의 의미를 바꾸는 데 있다. 그리고 내 생각에 페미니스트는 답이 없는 두 선택지에서 억지로 답을 고르는 게 아니라 선택지를 늘리거나 질문 자체를 바꾸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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