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2021.12.23 03:00 입력 2021.12.23 03:06 수정

시트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의 차정원(배해선)은 보수 정당의 검사 출신 4선 의원으로 지금 당장 당선 가능성이 없는 4, 5위 대권주자가 되기보단, 세를 불려 ‘차기’ 또는 ‘차차기’ 대권을 노리고자 하는 야심 많은 인물이다. 그의 명분은 오직 자신의 정치적 포지션을 강화하는 것에 있다. 자신의 행보에 방해가 되는 인물은 뒷조사를 통해 회유와 협박을 서슴지 않고, 적대적인 관계의 인물과도 타협해서 쇼를 기획한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정권교체 2030의 힘으로!’라는 슬로건과 함께 보수 정당의 청년최고위원 캠프가 열리고 있는 한적한 공원. 현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비판하며 ‘영끌한 대출로 아파트 두어채 마련한 걸 죄악시하면 사회주의’ ‘종부세 때문에 코너에 몰린 청년들을 외면해선 안 된다’ ‘코인 투자에 실패한 청년들을 위해 정부에 장치를 마련하도록 요청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쩌렁쩌렁하다.

정치를 수단보다 목적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정치꾼’ 차정원에게 청년위원의 목소리는 그저 ‘표’로 환산된다. 말하는 주체만 청년으로 바뀌었을 뿐, 기존 정치 세력이 수호하려는 가치와 전혀 다를 게 없는 이야기가 중요하게 들릴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그가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는 ‘젊은 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필요해서다. 정당의 입맛에 맞게 하고 싶은 말만 골라서 읊어주는 청년과, 그 목소리에 미래가 있다고 외치는 구렁이 같은 기성 정치인의 환상적인 호흡이다.

청년최고위원이 마침내 핵심을 말하듯 옥타브를 올린다. “더 중요한 것은 청년 남성들의 좌절감입니다. 여성들에 대한 특혜가 여성에 대한 차별인 겁니다. 장관에 여성 많이 임용한다고 여성들 삶 나아졌습니까?” 낯빛이 달라진 차정원이 몸을 일으켜 보좌관이 건네는 물을 마시며 말한다. “지지율 오른 게 종교 쪽에서가 아니었구나.” 타고난 정치꾼처럼 보였던 차정원의 얼굴에 여성 정치인으로 살아오며 만들어진 ‘비위’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차정원은 민첩한 정치감각과 탁월한 처세술을 앞세워 권력을 잡고자 하는 정치인이다. 당론에 부합하는 이익을 대변하여 다수의 지지를 받는 것이 중요하기에 ‘여성’이란 정체성에 기반한 활동 역시 계산적이다. 이렇게 본능적으로 표를 읽는 시야는 그를 ‘여성’의 약자성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정치인이 아닌, 본인의 높은 지위가 곧 여성의 높은 지위로 평가되길 원하는 유형의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극중 라이벌인 문화체육부 장관 이정은(김성령)이 “쉽게 장관 자리에 올랐다”는 말을 듣게 되자 차정원이 굳은 얼굴로 “없어. 쉽게 올라오는 여자는 없다고” 말하며 그를 두둔한다. 상관의 성희롱을 겪던 검사 시절의 회상과, 동료 정치인에게 노골적인 추행을 당하는 차정원의 모습은 그 말의 피로를 더욱 깊게 만든다. 그러나 ‘판을 읽는 정치인’을 택한 차정원에게 그런 피해자성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감수해야 할 것이 된다. ‘차기’ ‘차차기’를 말하며 야심을 드러내지만, 그의 말에서 고독이 읽히는 것은 결국 권력을 잡기 위해 배회하다 결국 자신의 목소리를 잃게 된 여성 정치인들의 행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현실에서는 차정원과 같은 여성 정치인에게서 느끼는 씁쓸함이 곧 여성의 정치적 한계로 읽히기도 한다.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것으로 지지기반을 다지던 정치인이, 그에 반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던 정당에 합류하는 것이 ‘페미니즘 정치의 종말’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러하다. 이때다 싶어 ‘종말’을 선언하고 싶은 이들에게 빌미를 준 것은 비통한 일이나, 진심으로 ‘페미니즘 정치’에 내일을 봤던 이들이라면, 언제라도 다시 의지를 추슬러 ‘페미니즘’은 보편적인 가치이지, 단순히 진영 싸움의 콘텐츠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페미니즘은 청와대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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