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싶지 않다

2021.12.16 03:00 입력 2021.12.16 03:06 수정

예전 칼럼에서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All lives matter)는 말에 대해 잠깐 쓴 적이 있다.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에 맞선 백인들의 주장인데, 맥락을 모르면 보편타당함을 위장한 이런 말에 걸려들기 십상이다. 비슷한 예로 이퀄리즘(equalism)이 있다. 성 평등을 뜻하는 이 말이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로 나왔다는 것을 모르면 오독하기 쉽다. 여성 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고 이퀄리즘이라니, 단 두 개뿐인 성에서 결국 누구의 권리를 얘기하겠다는 건가? 평등을 가장한 이런 주장들은 마치 우월적 지위의 대형마트가 동네슈퍼에 대해 ‘시장에서의 공정 경쟁’을 보장하라고 외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평등’이나 ‘공정’이라는 말의 함정을 새삼 지적하려고 이런 예를 드는 것은 아니다. 오용되고 맥락이 삭제된 언어들로 인해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우리 모두가 점차 판단력의 둔화, 사고의 미궁에 빠져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다. 많은 이들이 걱정하는 문해력의 저하는 정말로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이런 언어들이 우리의 일상에 범람하게 된 탓 아닌가 싶다.

문해력이 저하된 이유를 분석하는 글은 많다. 나름대로 정리하면 이러하다. 첫째, 문해력의 저하는 당연히 지적 능력이 저하된 결과이다. 문제는 정보와 지식이 오히려 과잉인 시대에 왜 지적 능력이 쇠퇴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몇 년 전 나는 대학의 한 학기 시간강의를 맡았다가, 학생 한 명이 “교수님은 왜 PPT를 안 해주세요?” 하고 항의하는 바람에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교육서비스’라는 말처럼 교육이 공급자와 소비자의 거래관계가 되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돈을 내고 상품을 구매하려는 학생소비자의 당연한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공급자였던 것이다. 온라인 강의나 유튜브나 프레젠테이션 화면 몇 장으로 구매가 끝나는 지식은 다른 문제를 푸는 데는 쓸 수가 없다. 자신의 지식을 스스로 생산해보지 못한 ‘소비자’에게 지적 능력의 하향평준화는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둘째, 지적 능력의 저하에도 불구하고 문해력 저하는 가치관과 태도에서 기인하는 바 크다는 것이다. 스스로 지적이라 믿는 이들이 학력과 무관하게 오히려 문해력의 난조를 드러내는 것을 보면 그러하다. 한마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형성한 태도를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고민하고 판단한 결과라 여기겠지만, 사실은 미디어와 정보기술이 가리키는 대로 따른 결과일 수 있다. 정보과잉 속의 정보결핍, 가짜뉴스 범람, 반지성주의는 기술 환경에서 유래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플랫폼에서, 이용자 리뷰에서, 남초/여초 사이트에서 의견을 소비하고 강화한다. 기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가리키는 대로 우리는 만들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한자의 믿을 신(信)이 ‘사람(人)의 말(言)’을 뜻한다는 축자적 풀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의 말은 곧 믿을 수 있는 것이고 믿음이라는 전제 때문에 말로 기능한다. 따라서 문해력 저하는 언어의 공통 기반을 잃었다는 뜻이고, 의사소통에 기초한 공동체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회는 더 이상 공동체로 존속하기 어렵다. 그러나 순서가 바뀌었다. 혹시 문해력 저하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 아닐까. 흩어진 언어가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현실이 언어의 분열로 나타난 것 아닐까. 신자유주의적 각자도생의 논리에 오래도록 물든 결과 서로에 대한 서로의 불신과 혐오가 만연하게 되었고, 선정주의 언론과 정치가 그것을 부채질하여 이익을 챙기는 상황에서, 화를 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이런 현실이 만들어낸 결과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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