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퍼컷과 글로벌 포퓰리즘

당선인의 어퍼컷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효과가 꽤 괜찮아 보였던지 상대 후보도 발차기로 화답했다. 선거 기간에는 그런 보디랭귀지가 허용된다. 말과 글로만 하는 유세가 아니라 모든 정보를 통해 자기를 홍보하는 것이 필요하고, 유권자들 또한 표정 하나하나로부터 정보를 읽을 수 있는 직접 정치력을 지니고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거의 시간이 끝나면 당선인은 두 나라가 아닌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대통령의 말과 글은 이제 선전과 선동이 아니라 과학과 책임의 영역으로 박제가 되어 국격이 된다.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유세장에서는 눈앞의 군중에 매료되게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보디랭귀지가 지지자의 환호를 가져오는 그 순간 가장 큰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고 환호하는 군중 그들만이 진정한 애국자로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의 실패가 시작되는 메커니즘이다. 어퍼컷의 팬덤 정치가 가져올 수 있는 폐해이다.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이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가를 보기보다는 그 규모와 환호의 강도에 시선이 꽂히게 된다.

여러 공론장을 통해 단련된 정치인들은 이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빨리 배운다. 그러나 공론장의 다양성과 비정형성에 익숙하지 않거나 이를 소모적이라고 보는 리더들은 팬덤의 환호에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들의 전환적 리더십은 힘 있는 집행력과 효과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동일체가 되어 가는 대중을 상상한다. 수평적으로는 배제와 마이너스의 정치이지만 수직적으로 대중과 직접 소통하는 강한 정부를 만들 수 있다면 만족할 수 있다는 태세이다. 이른바 포퓰리즘의 프리퀄이다.

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포퓰리즘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경제적 포퓰리즘은 장·단기 이익을 구분하지 않고 장기적 전략보다는 눈앞의 성과에 매몰되는 경제 정책을 선호하는 행태를 말한다. 기본소득 논의가 국가 재정 건전화와 같은 장기 전략과 배치된다면 이런 의미의 포퓰리즘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다.

정치적 포퓰리즘은 대의제를 적대시하는 일종의 반엘리트주의를 의미한다. 정치적 포퓰리즘은 직접정치를 추진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장점이 있다. 대의제 속의 기득권화된 엘리트 체제가 제도 변환을 거부할 경우 현상타파적 직접정치가 새로운 정치 바람을 만드는 추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접정치라는 점에서 그것은 온택트 시대의 대안적 민주주의로 선호되기도 한다. 하지만 후쿠야마는 그것이 ‘자유민주주의’라고 볼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오랜 공식과의 공존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최근 새로운 포퓰리즘의 글로벌화가 화제다. 일부에서는 이를 ‘제3의 권위주의 물결’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5년 전 트럼피즘이나 현재의 프랑스 대선 현상처럼 소위 선진국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에서 현재의 포퓰리즘을 권위주의 유사 현상으로만 등식화할 일은 아니다. 어쨌든 세 번째 포퓰리즘은 앞서 정치 팬덤 현상이나 특정 문화적 가치 혹은 정체성과 관련된 정치 행태를 칭한다.

주지하다시피 신생 리더십이 특정 정체성에 근거한 팬덤식 정치를 몰아칠 경우 대의와 대표는 왜곡된다. 소위 정체성 정치와 연결된 문화적 형태의 포퓰리즘이 탄생하게 되는 배경이다. 후쿠야마가 이 세 번째 포퓰리즘을 정체성 정치와 연결짓고 있는 덕분에 소수자 정체성을 옹호해 온 좌파들이 욕을 먹고 있긴 하지만, 후쿠야마 스스로가 인정하듯이 정체성 정치는 더 이상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소위 젠더 선동이나 반이민자 선동, 인종주의 같은 행태는 우익 포퓰리즘의 전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후쿠야마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를 경제적·정치적 포퓰리즘의 대표자로 지적하면서도 그에게서 세 번째 포퓰리즘은 찾을 수 없었다고 단언한다. 적어도 베네수엘라 국민들을 갈라치기 하는 정체성 정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세번째 포퓰리즘에 대한 정의는 조금 더 분명해진다.

대선 기간 내내 포퓰리즘의 물결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한국 정치에 어떤 포퓰리즘의 잣대를 들이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새 정부의 정책을 판단하는 매우 중요한 프리즘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대남 선동과 같은 젠더 갈라치기나 대중혐오론과 같은 정체성 정치가 지속될 경우 대의와 대표의 왜곡은 불가피하다. 민주 정부를 약한 정부로 바라보는 착시가 스토롱맨에 대한 환호로 이어진다면 어퍼컷의 포퓰리즘 또한 사라지지 않을 듯하다. 그러다보면 지방선거 내내 리틀 어퍼컷과 리틀 발차기라는 칼군무들이 전국을 휩쓸지도 모를 일이다. K포퓰리즘이 타임지의 제목이라도 된다면, 이 해프닝을 누가 책임져야 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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