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정상외교를 둘러싼 논란을 그저 관전하는 처지이지만,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한국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의사를 배제한 채 “일본이 학수고대하던 해법”(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을 내놓았는데, 일본은 호응조치는커녕 독도, 위안부 합의, 후쿠시마 오염수 등의 청구서를 내밀었다. ‘12년 만의 셔틀외교 복원’으로 자화자찬한 한·일 정상회담의 적나라한 성적표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 취임 2년차인 올해 정상외교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외교안보라인 난맥으로 시작 전부터 불안한 4월 말 미국 국빈방문, 5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와 한·미·일 3자 회동에 이어 가을부터 유엔·주요 20개국(G20)·아세안 등 다자 회의도 줄줄이 예정돼 있다. 정상외교를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 ‘중꺾마’ 정신이라도 빌려 사태를 복기해야만 해결의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인위적인 외교 시간표 설정이 야기한 조급증, 굴절된 역사인식, 피해자보다 일본 측 입장을 두둔하는 발언 등 문제를 꼽자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국가 간 외교관계와 협상의 기본 상식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야말로 가장 위태로워 보인다. 동맹끼리도 국익 앞에선 치열하게 다투는 법인데 “대통령은 일본과 무엇을 주고받는 협상을 원하지 않았다”(김태효 1차장)고 했다. 애초부터 협상 의지가 없었으니 원칙도 팽개치고 실리도 놓친 참담한 결과가 나온 것인가.
한껏 밀착하고 있는 한·미·일 3국 가운데 미·일 정상이 지닌 공통점이 있다. 4년여 외무상을 지낸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외교 행보를 내치 부진의 돌파구로 삼을 만큼 자신감이 있다. 50년 전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됐고 상원 외교위원장, 부통령을 거치며 외교 분야에서 관록이 붙은 조 바이든 대통령은 미 역사상 가장 외교에 해박한 대통령으로까지 거론된다. 반면 “검사 출신으로 군사·외교 정책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은”(헤리티지재단 보고서) 윤 대통령은 취임 전까지 한반도의 지정학적 도전을 고민하거나 외교 무대에서 국익을 대변할 필요가 없었다.
외교 경험의 부재는 확증편향 없이 참모들과 허심탄회하게 소통해 해법을 모색했더라면 장점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과 끝까지 협상해야 한다는 실무진의 건의를 ‘결단’으로 압도했다는 일화, 의전·외교비서관과 안보실장 연쇄 ‘경질’과 주미대사 공백까지 이어진 사태를 보면 참모 용인술마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한·일 정상회담 참사를 빚은 태도가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반복됐다가는 외교안보 전략의 틀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 성공적인 국빈방문은 안보실 파동에도 결국 무산됐다는 K팝 스타 초청 공연이 아니라 북핵 위협과 반도체법·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같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미·중 전략경쟁 등 복합위기에서 국익을 극대화할 발판을 마련했느냐 여부가 결정한다.
통 큰 ‘양보’는 당내 정적을 포용하거나 야당과 협치할 때 보여주면 된다. 우리에겐 경제·군사력은 물론 문화의 힘으로 세계 속에 당당히 선 한국의 위상에 걸맞은 정상외교를 누릴 만한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