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과 수신

2023.10.04 20:27 입력 2023.10.04 20:30 수정

취업 포털 잡코리아에 따르면 2016년에 직장인의 79.4%가 번아웃 증후군을 겪은 경험이 있다(경향신문 2016년 4월14일 보도). 취업 포털 사람인도 같은 해 조사 결과 직장인의 88.6%가 번아웃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2019년에 이루어진 잡코리아의 조사에서는 그 비율이 95.1%까지 높아졌다. 우리나라 직장인 대부분이 번아웃을 경험했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일은 개인적이지 않다. 그것은 사회적 현상이고, 따라서 상응하는 사회적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사회적 원인은 길든 짧든 역사적 원인을 갖는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직장인의 휴가 일수가 짧고, 그마저 다 쓰지 못하는 나라다. 2016년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프랑스나 스페인처럼 연간 30일 유급휴가를 모두 사용하는 나라는 물론이고 우리와 비슷한 일본과 비교해도 차이가 있다. 일본은 연간 20일 휴가에 10일을 사용했는데, 한국은 15일 휴가에 8일을 사용했다고 한다. 일본은 ‘과로사’라는 말이 나온 나라이다. 한국이 일본보다 그 비율이 적을 리 없다. 이 문제 때문에 일본은 2019년 70년 만에 노동법을 개정했다. 한 달에 초과근무가 100시간을 초과할 수 없게 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차별을 금지했으며, 자유롭고 유연한 근무시간 선택을 위한 제도를 만들었다.

한국 사회의 인간관계, 조직문화, 사람들의 윤리적 감각 등에는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이 여전히 배어 있다. 수직적 인간관계와 위계질서 강조, 권위에 대한 복종적 태도, 조직을 위한 개인 희생을 당연시하는 태도, ‘좋은 삶’을 개인 각자가 아닌 조직이나 사회가 규정하는 계몽주의적 경향 같은 것들이 그런 예이다. 이런 점들이 한국 사회의 ‘과로’와 연관된다.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유학이나 유교의 영향력은 이제 미미하다. 유학 혹은 유교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말들도 인터넷에 떠돈다. 그럼에도 유학의 사회적 영향은 폭넓게 잔존한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어떤 영역에서 유학적 유산의 파편들을 편의에 따라 여전히 사용하기 때문이다. 유학적 관념과 관행의 파편들이 자의적으로 이용되기에, 그것의 본래 의미는 자주 일그러지고 악용된다. ‘수신(修身)’이라는 유학의 단어에도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흔히 ‘수신’은 장기간의 반복된 교육과 훈련을 통해 개인에게 사회 도덕을 체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 더해 평균적 한국인들은 타인의 눈을 의식해서 일상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규제한다. 그래서 ‘수신’이라는 말에서는 개인에게 강요된 사회적 위계나, 집단적 효율을 위해 강제된 복종의 느낌이 묻어난다. 이렇듯 수신은 개인의 내면을 억누르고, 그 과정에 개인이 가진 정서적·신체적 에너지를 소진한다. 그 에너지는 당연히 유한하다.

수신의 억압적 측면이 전통의 일부이긴 하지만, 그것이 조선의 유학 전통을 대표하지도 않고, 지금도 유지해야 할 것은 아니다. 권위주의적 조직에서 그것은 하급자에 대한 폭력적 무례함을 정당화하고, 그에 따른 하급자의 불안, 우울증 및 자기혐오를 부른다. 이를 감내하는 과정은 내적 에너지 소비를 극대화해 번아웃 현상으로 이어진다. 수신을 개인의 내면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자기 돌봄이나 관리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유학 내부에서 확보할 수 있다. 공자도 자기 내면의 정서적 건강함(仁)이 타인에 대한 외적 태도(禮)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타인에게 공감하는 건강한 마음이 그 공감을 겉으로 표현하는 방식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자신이 가진 정서적 자원을 관리하고 활용하는 기술, 외적 권위를 합리적으로 해석해 상대화하는 기술, 궁극적으로는 자기 기준에서 ‘좋은 삶’을 주체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 등이 ‘수신’에서 오늘날 배우고 익혀야 할 사항들일 것이다. 그쪽이 오히려 유학의 본래 취지에 부합하는 듯 보인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 연구원 전임연구원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 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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