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료를 독점한 예술가

2023.10.30 20:30 입력 2023.10.30 20:35 수정

‘카푸어 블랙’으로 불리는 ‘반타블랙’을 활용한 작품 세부(위)와 K1 전시장 전경 일부. 국제갤러리·도재기 선임기자

‘카푸어 블랙’으로 불리는 ‘반타블랙’을 활용한 작품 세부(위)와 K1 전시장 전경 일부. 국제갤러리·도재기 선임기자

지난 22일 막을 내린 국제갤러리의 아니쉬 카푸어 개인전을 보러 갔다. 새로 미술을 담당하게 되면서 가장 유명한 현대미술가 가운데 하나인 카푸어의 전시를 놓치는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일부 전시장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야 했다. 카푸어의 명성과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뒤늦게 전시장을 찾은 이유 중 하나는 반타블랙이었다. 카푸어와 반타블랙은 미술계에 큰 스캔들을 일으켰는데, 카푸어가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블랙’인 반타블랙의 독점적 사용권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재료를 독점한 예술가’로 비판받으며 미술계에 논란을 일으켰다.

반타블랙을 이용한 작품은 단연 인기였다. 빛을 99.96% 흡수하는 반타블랙은 정면에서 보면 칠흑 같은 어둠으로만 보인다. 평면적이면서도 깊이나 공간감을 가늠할 수 없어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빛을 모조리 흡수해버리는 반타블랙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느낌을 준다. ‘존재의 심연’이란 말이 어울릴 법한 암흑이다. 옆으로 이동하면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돌출되거나 오목한 모습이 드러나는데, 이마저도 입체적이기보다는 평면적으로 보인다.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에 작품 주변을 360도로 돌며 동영상을 촬영하는 관람객들이 많았다.

“무언가를 어떻게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천착했다”는 카푸어의 말처럼 반타블랙은 현존과 부재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물질성을 초월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반타블랙 작품들을 보면서 ‘초월적 기분’을 온전히 느끼기는 어려웠다. 카푸어가 반타블랙이란 재료를 사용하게 된 방식 때문이다. 2014년 영국에서 만들어진 반타블랙은 ‘물감’이 아니라 군사·우주 산업에 사용하기 위해 탄소나노튜브 기술을 이용해 만든 물질이다. 적외선까지 흡수하기에 인공위성이나 위장용 도료로 활용된다.

아니쉬 카푸어. 국제갤러리 홈페이지

아니쉬 카푸어. 국제갤러리 홈페이지

2019년 기준 영국 부호 876위에 오른 카푸어가 미술가라면 군침이 돌 만한 매력적인 재료를 사들여 독점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거대 기업이 시장을 독점하는 현실과 똑 닮았다. 관람객은 반타블랙을 이용한 작품을 감상하면서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논리가 구현되는 방식을 체험하는 셈이다. 카푸어는 반타블랙이 다른 예술가에 의해 창조적으로 쓰일 기회를 빼앗았지만 한편으로는 물감 개발에 대한 열정을 북돋기도 했다. 스튜어트 셈플은 ‘가장 분홍스러운 분홍’이란 물감을 개발해 카푸어를 제외한 모두가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셈플은 “이 핑크는 소유권과 엘리트주의, 특권과 접근성에 대한 것”이라고 밝혔다.

반타블랙은 더 이상 ‘가장 어두운 블랙’이 아니다. MIT 연구진이 2019년 가시광선을 99.9995% 흡수하는 물질을 개발해 예술가 디무트 슈트레베와 함께 다이아몬드에 이 물질을 발라 전시했다. 가장 높은 빛 반사율을 가진 다이아몬드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었다. 연구진은 예술가에게 비상업적 용도에 한해 물질을 제공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반타블랙을 사용한 작품은 현실에 난 검은 싱크홀을 보는 듯한 초월적 느낌을 선사한다. 카푸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반타블랙의 특징을 이용한 작품세계를 선보였다. 하지만 예술작품은 시대와 사회, 맥락을 초월해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은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초월하며, 균열을 일으키는 질문을 던진다. 카푸어와 반타블랙의 경우, 작품의 초월성보다 시장의 작동원리를 반영한 ‘현실의 중력’이 더 컸다.

이영경 문화부 차장

이영경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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