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일의 좋은 정부 만들기] 공무원에게 보내는 갈채

런던시청 공무원 윌리엄스는 수십년간 반복적인 일상을 이어왔다. 아침마다 같은 시간에 열차를 타고 출근하여, 종일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한 후, 정해진 시간에 퇴근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윌리엄스는 의사에게서 6개월 남짓의 시한부 인생임을 통보받는다. 난생처음 무단결근하고 인근 휴양지로 떠난 그는 합석한 무명작가의 제안으로 술집에 가고 스트립쇼도 보지만 공허한 마음을 채우지 못한다. 방황을 이어가던 윌리엄스는 우연히 퇴직한 부하직원 마거릿을 만나고, 그녀와 함께 비싼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술집도 가게 된다. 밝고 긍정적인 마거릿은 처음의 식사 제안에 흔쾌히 응했으나 계속되는 이전 직장상사의 추근거림(?)이 곤혹스럽다. 불편해하는 마거릿에게 윌리엄스는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라고,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그녀의 밝고 쾌활함이 너무 부럽다고, 젊은 시절 자신의 꿈은 지금 같은 삶이 아니었노라고 회한에 젖은 고백을 한다. 마거릿과의 대화 끝에 “기억났어요, 살아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라고 외친 그는 시청 공무원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복귀한 윌리엄스의 일처리는 180도 달라졌다. 그는 물이 고인 웅덩이와 폐자재로 뒤덮인 동네 공터에 어린이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는 민원에 매달린다. 우리 소관이 아니라고 떠넘기고, 검토하겠다면서 책상 모퉁이에 처박아 둔 서류를 꺼내서 부하직원과 공터로 직행한다. 이후 관련 부처를 직접 찾아다니고, 귀찮아하는 상사를 설득하며 일을 진척시킨다. 눈 내리는 겨울밤, 완성된 놀이터 그네에서 따뜻한 시선으로 노래를 읊조리며 윌리엄스는 숨을 거둔다. 그의 장례식 날, 윌리엄스의 상사는 어린이 놀이터 조성을 자신의 공적인 양 생색내려 한다. 그러나 동네 주민들은 윌리엄스 덕분임을 잘 알고 있다.

무사안일과 적극적 행정 사이

이상은 며칠 전 본 <리빙: 어떤 인생>이라는 영화 내용이다. 이 영화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이키루(生きる, 살다)>를 리메이크한 것이다. <리빙>도 그렇고 원작인 <이키루>도 그렇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되는 일을 함으로써 삶의 보람을 느낀다는 교훈이 담긴 휴머니즘 영화로 알려져 있다. 그런 면도 있다. 그러나 행정학과 교수인 나에게는 다르게 읽힌다. 내가 <리빙>을 보게 된 계기는 이키루의 리메이크작이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 강의에서는 동영상 매체 활용이 익숙하다. 나도 한 학기에 한 번은 강의 시간에 영화를 보여준다. 복지정책 수업에서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나 <미안해요, 리키> 같은 영화를 활용한다. 이키루는 행정학 원론 수업에서 단골로 활용하는 영화였다. 공무원의 한계와 장점을 제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70여년 전 흑백 영화라서, 그보다는 요즘 감성에 맞는 영화로 대체하고 싶은 마음에 리메이크작을 찾은 것이다(참고로 수업 목적의 동영상 활용은 저작권법의 예외 적용을 받는다).

두 영화는 관료제의 병폐를 꼬집는 장면을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영화는 민원인을 뺑뺑이 돌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A부서에 갔더니 우리 소관이 아니니 B부서로 가라 하고, B부서에 갔더니 C부서로 가라 하고, C부서에선 다시 A부서로 가라고 한다. <리빙>에선 출근 첫날인 신입직원에게 책상에 서류를 잔뜩 쌓아두라고 한다. 서류 더미가 얄팍하면 너무 쉬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면서. <이키루>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 말고는 월권행위니까, 우리는 일하는 표정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밖에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키루>는 1952년에 나온 영화다. 리메이크작인 <리빙>도 1950년대 런던이 배경이다. 오늘날 공무원의 일처리가 70여년 전과 같을 리 없다. 요즘 민원인을 뺑뺑이 돌리다가는 당장 SNS에서 난리가 난다. 접수된 민원은 정해진 기한 내에 진행 상황과 결과를 알려주게 규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공감되는 모습도 있다. 리빙 영화평 중에도 ‘영국이나 우리나 공무원 일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듯’이라는 게 있었다.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두 가지다. 나 아닌 남을 위한 일이라는 행정의 본질과 법 규정을 준수해야 하는 관료제 특성에서 비롯된 무사안일주의 경향이 하나다.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이 적극적으로 나서면 사람들의 삶을 좀 더 낫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행정안전부에 근무하는 친한 후배 공무원이 있다. 그는 수년 전, 많은 돈이 필요하고 긴 시간이 소요되는 점자책의 발간 비용을 대폭 낮추고 하루 만에 완성하는 혁신을 이뤄냈다. 기존의 점자책은 일반 서적을 사람이 일일이 타이핑한 후 점자로 바꾸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점자도서관은 타이핑 인력 증원을 위한 예산을 요청했다. 담당 공무원인 후배는 예산부처 대신 전자책 회사(예스24)와 점자 스마트워치 개발 벤처기업(닷)을 찾아갔다. 벤처기업의 기술력으로 전자책 데이터를 점자로 변환하는 장치를 구현하고, 이를 전자책 회사 내에 설치하여 전자책 데이터를 활용하여 바로 점자책을 만들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3·1 문화재단의 비용 후원도 이뤄졌다. 후배 공무원의 노력 덕분에 지금은 더욱 많은 점자책을 훨씬 빠르게 제공한다.

‘디자인’에 따라 결과는 판이

잘 아는 사례라 소개했지만, 그 밖에도 공무원의 노력으로 세상이 나아진 사례는 부지기수일 것이다. 내가 재직하는 고려대 행정학과의 모토는 ‘국가를 디자인하라’이다. 좀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전하려는 뜻은 명확하다. 행정은 집행으로 구현되지만, 본질은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같은 문제라도 어떻게 디자인해서 집행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다. ‘점자책 공급 증대’라는 과제에 대해 타이핑 인력 확충 예산 증액으로 대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고민하고 해결책을 디자인하니 멋진 결과를 낳았다.

“국민의 세금으로 좋은 일 하는 것이 공무원의 최고 장점입니다. 공무원 개인은 부자가 아니라도 사회의 필요한 곳에 돈을 써서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점자책 프로젝트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공무원의 좋은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후배의 답변이었다. 2023년의 끝자락, 내년에도 자부심 갖고 적극적으로 업무에 임하시라는 의미로 전국의 공무원에게 박수를 보낸다.

김태일 고려대 교수·좋은예산센터 소장

김태일 고려대 교수·좋은예산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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