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집단자살과 위안부

2007.06.24 18:48

한국인에게 일본 오키나와(충繩)는 관광지란 인상부터 떠오른다. 실제 상하(常夏)의 오키나와에서는 맘껏 여름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한편으로는 옛 류큐(琉球)왕조의 기억도 더듬을 수 있다.

이런 오키나와지만 꽤 험한 세월을 겪어왔다. 당장 주일미군 기지가 밀집해 있어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웃 국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태평양 전쟁 때는 민간인들이 큰 고초를 겪었다. 일본 패전 직전인 1945년 봄 오키나와에서는 미군과 일본군 간의 격전이 벌어졌다. 패색이 짙었던 일본은 오키나와를 본토 방어의 보루로 여겼다. 당시 전투로 일본군, 미군, 민간인 등 24만여명이 숨졌다. 이 가운데에는 강제징용된 조선인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전후 일본은 오키나와 전투가 끝난 6월23일을 위령의 날로 정해 매년 기념행사를 열어왔다. 행사에는 도쿄에서 국정 최고책임자인 총리까지 건너와 참석한다. 그러나 올해 행사의 양상은 과거와는 사뭇 달랐다. 계기는 지난 3월30일의 교과서 검정이다. 당시 문부과학성은 도카시키(渡嘉敷) 마을 집단자살 사건을 다룬 고교 교과서를 검정하면서 ‘군이 자살을 강제했다’는 내용을 삭제토록 했다. 도카시키 사건은 1945년 3월26일 미군 상륙으로 일본군 전세가 불리해지자 마을 주민들이 자살하는 등 최소 315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집단자살이 일본군의 강제로 이뤄졌다는 것은 오키나와에서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생존자들은 일본군은 미군에 사로잡히면 잔인하게 살해당할 것이라며 주민에게 직접 수류탄을 건네는 등 자살을 강제·유도했다고 증언해 왔다. 그러나 문부과학성의 결론은 달랐다. “군이 자살을 강요했다는 것은 통설이지만 당시 지휘관이 소송에서 이를 부정하고 있고, 지휘관의 직접 명령도 확인되지 않았다.”

검정 결과 발표 이후 오키나와에서는 분노의 함성이 터졌다. 지난 22일에는 자민당이 지배하는 현의회에서도 “집단 자살은 일본군에 의한 명령·강제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다”며 검정 의견 철회 의견서를 채택했다. 오키나와현의회 의장(자민당)은 당시 8세였던 자신의 체험을 증언했다. “주민 200명 정도가 토굴에 숨어있었다. 일본군 3명이 와 울고있던 동생과 사촌에게 독이 든 주먹밥을 먹이도록 강제했다. 미군에 들키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함께 죽겠다’며 토굴을 박차고 나왔다.” 아사히 신문은 이를 “밀고 들어오는 미군, 투항 용납않는 일본군, 그런 이상 사태가 집단 자살을 몰고왔다”고 표현했다. 아베 총리는 23일 교과서 검정에 대해 “학술적 관점에서 검토하고 있다”고 말하는 데 그쳤다.

오키나와 집단 자살을 바라보는 일본 정부의 시각은 군 위안부 대응의 재판(再版)이다. 광의의 강제성은 인정하지만 협의의 강제성은 없다는 논리 역시 똑같다. 오키나와 주민이나 군 위안부 피해국 입장에서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다. 물론 바탕에는 과거 일본군이 무조건 잘못했다는 이른바 ‘자학사관은 틀렸다’는 시각이 깔려있다. 일본 위정자들의 입에서 진실을 들을 수 있는 게 연목구어(緣木求魚)인지 새삼 걱정된다.

〈박용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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