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인가, 대개혁인가

2014.12.14 21:34 입력 2014.12.14 22:28 수정
정태인 칼 폴라니 연구소 창립 연구위원

“ ‘안녕들 하십니까?’가 유행이라는데, 전혀 안녕하지 못했던 2013년이 저물고 갑오년이 온다.” 작년 이맘때 내가 쓴 ‘정동칼럼’의 첫 문장이다. 바로 그 갑오년에 나는 안녕하시냐는 통상의 인사마저 송구스러워 “안녕하지 못하시죠?”라는 말로 글이나 강연을 시작해야 했다.

정태인 칼 폴라니 연구소 창립 연구위원

정태인 칼 폴라니 연구소 창립 연구위원

2014년을 되새기는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낱말들은 ‘세월호’ ‘피케티’ ‘프란치스코 교황’ ‘초이노믹스’ 등이다. 금년 4월16일은 또 하나의 국치일이었다. 우리는 배가 반쯤 물에 잠겨 있다가 완전히 침몰하는 상황을 며칠에 걸쳐 슬로모션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명의 목숨도 구하지 못했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쏟아지는데도, 내 일이 아니라는 듯 한 달 동안 침묵하던 대통령은 눈물을 흘리며 ‘국가 대개조’를 약속했다. 그리고 7개월이 지난 지금 그 국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개악을 향해 달리고 있다. 대통령은 두 달 뒤, ‘국가 대개조’란 바로 그의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이라는 듯, “눈 딱 감고 규제를 풀라”고 외쳤다. 놀랍게도 그는 크루즈 산업을 대표적 사례로 들었다.

위기의 원인을 제거하기는커녕 오히려 부풀리는 건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 되어버렸다. 1993년 292명이 사망한 서해페리호 참사가 터지자 정부는 여객선 안전을 한국해운조합이라는 곳에 맡겼다. 당국의 책임이 문제가 되자 새 민간기관에 규제 권한을 떠맡겼는데 그곳이야말로 해양수산부 관료들이 재취업하는 ‘관피아’의 소굴이 되었다. 1997년 무분별한 자본시장 개방으로 외환위기가 터지자 정부는 IMF의 후원 아래 개방과 규제 완화, 민영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990년대 중반은 한국의 거의 모든 장기 경제통계 추세에 꺾임점을 만들었는데 특히 불평등에 관한 지표들은 악화 쪽으로 가파른 기울기를 보였다.

프랑스의 젊은 경제학자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그의 방한을 계기로 한국에도 꽤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300년의 장기 불평등 통계를 토대로 그는 앞으로 세계가 세습자본주의로 향할 것이라며 민주주의의 질식사를 우려했다. 5월에 발표된 한국은행의 국민 대차대조표를 이용해서 2000년부터 2012년까지 피케티 비율을 계산한 결과, 한국은 그 세습자본주의의 강력한 후보로 나타났다.

교황은 2013년 <복음의 기쁨>에서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고 선언했다. 지난여름 그의 방한은 절망의 구름을 뚫고 내리꽂힌 한 줄기 빛이었다. 교황은 한국에 머문 동안 내내 세월호의 노란 배지를 달고 있었고 단식으로 여윌 대로 여윈 ‘유민이 아빠’를 감싸안았다. 교황은 ‘새로운 독재’ 앞에서 눈감는 것은 공모라고 규정하고, 특히 사제는 거리로 나서서 ‘형제애의 공동체’를 실현하라고 주문했다. 평등과 연대를 염원하는 교황에게 규제 완화는 독재의 뿌리인 반면, 한국의 대통령에게 규제는 암덩어리이다.

최경환 부총리는 인사청문회에서 ‘지도에도 없는 길’을 갈 것이라며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고 임금을 올리지 않는 한 한국의 미래는 없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혹시나 했던 그의 초이노믹스는 “빚 내서 집 사고 전세금 올려주라”는 부채주도 성장전략일 뿐이었고 그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구조개혁’을 내세워 결국 노동의 하향평준화와 규제 완화의 길로 매진하고 있다. 7조원의 감세 혜택을 받은 대기업에 고작 1000억원대의 세금을 물리는 이른바 ‘가계소득 증대세제 3대 패키지’만 외로이 남았을 뿐이다.

대한민국호는 이미 좌초하고 있다. ILO는 물론, 신자유주의의 첨병이라는 IMF, OECD에서도 불평등이 성장을 저해한다는 보고서가 속속 출간되고 있다. 그 속에서 한국은 ‘경제혁신’과 ‘구조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벼랑으로 이르는 길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15년 전망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전쟁으로 이어질지도 모를 대위기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불평등을 극적으로 완화하는 개혁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세계사에도 우리 역사에도 새로운 길은 혁명에 준하는 대개혁을 거쳐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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