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약은 아니다

2015.04.21 21:19 입력 2015.04.21 21:23 수정
김정인 | 춘천교대 교수·한국사

봄길을 따라 명량해전이 벌어졌던 울돌목 위 진도대교를 건넜다. 양지바른 둔덕의 노란 개나리와 1년의 세월을 견뎌낸 빛바랜 노란 리본이 어우러진 길을 따라 팽목항에 다다랐다. 295명의 영령은 조그마한 컨테이너 박스 안에 모셔져 있었고, 9명의 돌아오지 못한 망자를 향한 절절한 사연들은 부둣가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정동칼럼]세월이 약은 아니다

3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켜켜이 쌓아 놓았던 슬픔이 물밀 듯 밀려와 몸도 마음도 부르르 떨렸다. 누구든 그곳에 가면 팽목항의 시계가 아직 2014년 4월16일에 멈춰 있음을 깨닫게 된다.

2015년 4월16일, 박근혜 대통령이 팽목항에 갔다. 유가족이 항의 표시로 분향소의 문을 닫고 떠나버린 그곳에서 ‘위로’의 말이라며 ‘이제는 희생자들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희생자들이 원하는 가족들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고통에서 벗어나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대통령의 시계만 똑딱거린 1년이었나 보다. 대통령은 아직도 모르는 듯하다. 유가족이 2014년 4월16일에는 꽃다운 생명들이 살아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을. 세월호 침몰이 일어난 날이지만 아이들을 저 세상으로 보낸 날은 결코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을. 그날 혼신의 힘을 다해 구조했다면 올봄을 함께 누렸을 자식들을 국가가 내팽개쳐 죽어갔다고 여긴다는 것을. 국가의 배반에 들끓는 분노를 삭이며 살아온 유가족이 갈망하는 것은 진실이지 위로가 아니다. 세월호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자며 망각을 권하는 대통령의 말은 곧 진실을 은폐하겠다는 엄포로 들려 또다시 억장만 무너질 뿐이다.

국가란 무엇인가? 19세기 끝자락에 등장한 ‘독립신문’은 ‘생명권은 천부인권이고 국가는 인민의 생명 보호를 위해 존립한다’고 주장했다. 세월호 참사로 이 민주주의적 상식을 일거에 무너뜨린 21세기의 대한민국은 마땅히 처절하게 반성하고 성찰해야 했다. 현실은 참혹했다. 지난 1년간 유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는 속죄하는 죄인이 아니라 군림하는 가해자였다. 진실에 목말라 거리에 나선 유가족을 끊임없이 사회 혼란과 경제 침체의 주범인 양 몰아갔다.

‘종편’이 앞장서고 ‘일베’가 거들었지만, 유가족은 대통령의 눈물에서 단 한발도 나가지 않은 국가에 더욱 깊은 상처를 받았다. 정치도 결코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진실로 향한 시계는 멈췄고, 그사이 대한민국은 둘로 갈려 독하게 갈등했다. 1주기가 다가오자 국가는 다시 유가족에게 가해의 칼을 들었다. 유가족은 물론 국민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합의된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꾸린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하기도 전인데, 느닷없이 보상과 배상 문제를 꺼냈다.

국가적 재난을 극복하는 길은 과거사 청산의 길과 똑같다. 진상 규명이 최우선이다. 이에 따라 책임의 소재와 내용과 범위가 밝혀지면 그때서야 책임자 처벌과 함께 배상이 이루어진다. 비록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지만,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며 피해자를 위로하고자 할 때는 보상을 한다.

지금 박근혜 정부는 세계가 합의하고 있는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절차를 뒤엎고 있다. 국가적 재난을 제대로 처리할 줄 모르는 무능함 때문일까. 아니면 절대로 밝혀져서는 안되는 진실이 있어서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진상 규명이 선행되지 않는 한 배상과 보상 문제 역시 깔끔한 매듭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진상 규명은 세월호 참사로 졸지에 가족을 떠나보낸 유가족과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슬퍼한 국민에게 덮친 정신적 외상, 즉 트라우마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치유의 첫 단계이기도 하다. 진실을 알고 그 진실 속에서 죽어간 이들의 마음에 살아있는 ‘내’ 마음을 온전히 포개어 보는 심리적 일체화가 가능해질 때, 유가족도 일상의 가족으로 돌아갈 채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국민들도 집단적 우울증에서 벗어나 죽어간 이들을 진심으로 애도하며 그들의 희생을 제대로 기릴 수 있는 가치와 삶을 깊이 고민하고 새기게 될 것이다.

2014년 4월16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유가족과 국민, 나아가 대한민국 ‘호’의 앞날을 위해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세월이 약이라고들 하지만,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부모와 또래의 자식을 키우는 부모 세대가 겪은 세월호 참사엔 결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세월호와 함께 진실이 인양되지 않는 한, 마냥 흘러가는 세월이 상처를 아물게 하는 약이 될 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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