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맹물 맛을 느끼자

2015.02.15 20:51 입력 2015.02.15 20:58 수정

한때 큰스님들을 만날 때마다 물었다. “깨달음의 맛은 어떤 맛이냐”고. 앞뒤 둘러볼 겨를도 없이 살아가는 세속인으로서 출가 수행자가 맛본 깨달음의 맛이 진짜 궁금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겠다고 ‘쇠로 된 나무에 꽃을 피워내듯’ 평생을 비범한 삶을 산 선승(禪僧)들 아니던가.

[아침을 열며]설, 맹물 맛을 느끼자

먼저 꾸지람이 날아온다. “스스로 맛을 봐야지, 귀로 그 맛을 봐 뭐하게”라는 호통이다. 그러고 나서 들려주는 스님들의 답은 공통적이다. 문경 봉암사든, 승주 송광사든, 도심의 사찰에서든 어디서 만난 스님이든 한결같다. “맹물 맛!”.

맹물도 맛이 있던가. 달지도 쓰지도 시지도 떫지도…않다. 혀로는 알 수 없는 맛이다. 굳이 맛으로 표현하자면 맛 없는 맛이다. 맛이 없는 맛, 알 수 없는 맛, 맛 본래의 맛, 곧 모든 맛…. 화두를 처음 쥔 스님마냥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고 보니 낯설기만 한 말이 아니다. 이 맛 저 맛, 세상살이의 쓰고 단 온갖 맛을 경험한 고향 어르신들도 맹물 맛이 최고라고 이야기했다. 맛의 정수, 더 이상 그 어떤 맛도 용납하지 않는 순수한 맛, 어떤 맛으로든 변화가 가능한 맛이어서일까.

내일, 모레, 글피면 설날이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통 민속명절이다. 1000년 전, 100년 전, 10년 전 설 모습이야 많이 달라졌다. 한국인의 삶,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 변화 속에 오롯이 담겼다.

서로 힘을 모으며 공동체를 강조하던 농경사회가 무한경쟁 사회로 급변했다. 근대란 이름 아래 ‘서양 것’은 문명이고, ‘우리 것’은 미신으로 여기기도 했다. 세계화를 문화다양성의 귀중함이 아니라 획일성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그 속에서 그 많던 세시풍속들은 사라졌다. 민속학자 임동권의 연구를 보면, 설날부터 정월대보름까지 단 15일간에 무려 102건의 놀이와 의례가 있었다. 대대로 이어진 수백년의 정서와 상상력이 농축된 세시풍속이야말로 영화, 공연, 소설, 게임으로 거듭날 문화 콘텐츠들인데…. 일상 속에 펄떡이며 살아있는 놀이, 의례가 박물관·고궁의 전시·체험으로 박제됐다. 세시풍속들 저마다의 독특한 상징, 의미도 사라졌다.

닐 암스트롱의 달착륙 이후 더 이상 달에서 옥토끼와 계수나무를 상상하지 않듯 상상력의 깊이와 폭이 쪼그라들었다.

세상 곳곳의 삶, 생활양식의 모든 것인 문화가 획일화되자 이젠 세계적으로 문화다양성, 독창성과 창의성·차별성이 오히려 강조된다. 그래서 우리만의 정서·지역성이 녹아든 ‘우리 것’을 잃은 아쉬움이 더 크다. 숱한 문화 콘텐츠는 잊어버리고 책상머리에 앉아 마른 수건 짜듯 창의적 콘텐츠를 뽑아내는 세태가 안타깝다. 더 안타까운 일은 문화융성을 국정 기조로 한 박근혜 정부에서 문화다양성, 창의성을 옥죈다는 사실이다. 영화제 사전심의 부활이 논의되고, 상영작 논란이 빚어진다. 우수 문학도서 선정 기준에 특정 이념, 순수문학이란 개념까지 운운한다.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이라고 국제미술전에 전시되지 못하고, 창의교육을 말하면서 인문학과 축소로 이어진다.

문인, 영화인, 미술가, 인문학자들이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목말라한다. 표현과 사상의 자유, 무한 상상력이야말로 창조경제의 핵심이라는 문화 콘텐츠의 뿌리 아니던가. 문화융성이란 말이 오히려 ‘개뿔’로 여겨지는 요즘이다.

팍팍한 삶 속에서도 내일부터 수많은 이들이 귀향길에 나선다. 모든 게 포용되고 쉴 수 있는, 어머니 자궁 같은 곳을 찾아서다. 어쩌면 단맛 쓴맛 다 맛보지만 잊지 못하는 맛, 본래의 맛을 찾아서일 수도 있다.

설날에는 많은 것을 만난다. 그립던 사람들, 시간과 공간들, 잊혀진 세시풍속의 한 자락까지도. 그 만남 하나하나가 거울이 되고, 마중물이 되어 자신을 돌아보는 풍성한 성찰의 기회가 될 수 있다.

형제자매와 떠들고 놀면서 나의 현재를 보고, 고향집 마당과 뒷동산에선 어떤 맛도 스며들지 않은 내 과거를 만난다. 성묘길은 내 앞날이다. 고갱이 유작으로 그린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떠올리고, 메멘토 모리를 되뇌며 죽음같이 피할 수 없는 실존적 물음을 던질 수도 있다.

눈 밝은, 생각 깊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뿌리를 찾을 것이다. 그리곤 ‘오래된 미래’의 참 뜻을 비로소 삶 속에 되새기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겠다.

설날, 고향은 가장 순수한 삶의 맛, 본래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일 테니까. 이번 설이 모든 이에게 깨달음의 맛, 맹물 맛을 느끼게 하는 성찰의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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