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없는 담뱃값 인상

2014.10.08 21:12 입력 2014.10.08 21:27 수정
이진석 | 서울의대 교수·미 텍사스 보건대학원 교환교수

나는 담뱃값 인상의 열혈 지지자다. 2004년 말 정부가 담뱃값을 500원 인상할 때에도 작은 힘이나마 옆에서 거들었고, 박사논문 주제도 담뱃값 인상의 금연 효과를 분석한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에 정부가 추진하는 담뱃값 인상은 지지할 수가 없다. 국민건강 증진이 아니라, 중앙정부의 구멍 난 세수 메우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시론]염치없는 담뱃값 인상

담배에 붙는 세금은 소득 역진적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동일한 액수의 세금을 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더 크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담배로 인한 건강 피해의 역진성은 훨씬 심각하다. 가난한 사람이 담배를 더 많이 피우고, 담배를 끊기도 힘들다. 개인탓도 있지만, 고단한 삶과 열악한 주변 환경 탓이 더 크다. 이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흡연 관련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더 크고, 이런 질병에 걸렸을 때 치료비를 감당하는 것도 더 힘들다. 만약 이런 건강 피해의 역진성을 완화할 수만 있다면, 비록 소득 역진적이더라도 담뱃값 인상을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04년 말 이후, 담뱃값 인상의 소득 역진성을 상쇄할 만한 건강 피해의 역진성 완화 효과는 발생하지 않았다. 소득계층 간의 흡연율 격차는 여전히 크다. 당시의 담뱃값 인상으로 매년 1조원가량의 건강증진기금이 추가로 확보됐지만, 건강 피해의 역진성을 완화하는 데 쓰인 돈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이를 위한 정부의 노력도 미미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2004년의 판박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연간 2조원에 달하는 건강증진기금의 쓰임새를 보면, 한마디로 문제투성이다. 2011년 국회 예산정책처는 건강증진기금의 약 80%가 기금의 설치 목적과는 상관없는 곳에 사용됐다고 지적했다. 올해 건강증진기금에서 국가금연지원서비스 예산으로 책정된 액수는 113억원, 흡연자 1인당 1년 통틀어 260원꼴이다. 이에 반해 줄기세포, 유전체, 미래융합의료기기 등 첨단 보건의료연구개발 사업에는 2300억원가량을 투입하고 있다. 정부 스스로도 이런 데 건강증진기금을 끌어다 쓰는 것이 겸연쩍은지 ‘21세기 대표적 고부가가치 미래 성장산업인 보건의료 산업을 육성·발전시켜 국민의 생명·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라고 억지 명분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식이면, 건강증진기금으로 차세대 전투기도 살 수 있다. 북한 도발로부터 영공을 수호해 국민의 생명·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이뿐만이 아니다. u-Health 인프라 확충, 혈액안전관리, 신종 감염병 대책, 생물테러, 기후변화 대응 등 온갖 군데에 건강증진기금을 끌어다 쓰고 있다. 예전에는 모두 정부 일반예산으로 시행하던 사업들이다. 이렇게 원칙 없이 써대는 바람에 건강증진기금이 바닥나버렸고, 2011년부터는 공공자금관리기금에서 돈을 빌리는 신세가 됐다. 올해에만 무려 4500억원을 빌리고, 300억원을 그간 빌린 돈의 이자를 갚는 데 지출한다고 한다.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연일 빚내서 잔치판을 벌였던 것이다.

기금 사용에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담뱃값을 올리면 흡연율이 떨어지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담뱃값 인상의 심리적 충격과 경제적 부담, 집요한 금연사업이 더해져야 흡연율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담뱃값을 2000원이나 인상해도, 이런 사업을 할 추가적인 재정 여력이 없다. 담뱃값 인상으로 늘어난 세수의 절반 이상을 담배에 새로 부과되는 개별소비세 명목으로 중앙정부가 뚝 떼어 간다고 한다. 건강증진기금이 늘어나는 몫은 일부에 불과하고, 그 조차도 건강보험 지원금으로 떼주고 나면 남는 것도 별로 없다. 기존의 파행적인 기금 쓰임새도 손볼 기미가 없다. 결국 예전 수준의 금연사업을 답습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비정상이 아닌 정상의 길을 택해야 한다. 국민건강을 위한다는 명분을 무색하게 하는 개별소비세 부과 방침을 재고해야 한다. 그리고 파행적인 기금 쓰임새를 대폭 정비해야 한다. 기금의 설치 목적과 상관없는 사업은 기금 밖으로 내보내고, 상관있는 사업은 충분한 예산을 배정해 제대로 시행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관계 부처 공무원과 이해관계 집단이 임의로 기금에 손대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도 필수적이다. 이런 연후에 담뱃값 인상을 내놓는 것이 정상적인 순서이다. 이렇게 한다면, 정부는 박수를 받으며 담뱃값을 인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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