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심기(心氣) 경호

2012.05.31 21:12
손동우 논설위원

지금이야 그런 일이 없겠지만 1960~7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시절 초·중등학교에서는 장학사들의 행차 때마다 학교 전체가 발칵 뒤집어지곤 했다. 며칠 전부터 모든 학생들은 쉬는 시간이나 방과후에 운동장의 사금파리나 시멘트 조각, 과자 포장지 등을 이 잡듯이 골라내야 했다. 또 교실이나 복도의 나무 바닥은 파리가 앉다가 미끄러질 정도로 양초를 칠하고 걸레로 문질러 반짝반짝 윤을 내야 했다. 이러한 ‘환경미화 작업’은 교육적 측면보다는 교육현장의 통제관인 장학사들의 ‘심기’를 편하게 하기 위해 이뤄졌다. 이를테면 ‘장학사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가 목적이었던 셈이다.

일개 교육청 4·5급 공무원인 장학사의 심기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시대적 분위기였으므로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경우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대통령 경호에서 단순히 대통령의 신변을 보호하는 통상적인 업무를 넘어서 대통령의 심기까지 편안하게 해야 한다는 이른바 ‘심기 경호’가 등장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심기 경호’는 전두환 정권 시절 장세동 대통령 경호실장이 ‘대통령의 마음이 편안해야 국정도 잘되니 심기까지 경호하자’는 뜻으로 만든 용어로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에도 용어만 없었을 뿐 구체적 사례는 숱하게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방귀를 뀌자 측근들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아부를 한 것이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려던 도지사가 실수로 라이터 불을 세게 켜서 대통령의 심기를 어지럽혀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죽도록 얻어맞았다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5일 경인아라뱃길 개통식에 참가했을 때 때아닌 ‘심기 경호’가 등장했다고 한다. 경호지원 업무에 나선 일선 경찰관들에게 △사복은 제복으로 갈아입을 것 △VIP(대통령)에게 ‘길거리에 쫙 깔린 경찰에게 경호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심기 경호가 이뤄져야 한다 등의 ‘근무지침’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있는 듯 없는 듯이 하는 경호’가 하나의 원칙이었으나 민주주의 역주행이 이명박 정권의 ‘국정 지표’가 된 지금 마침내 ‘심기 경호’까지 관 뚜껑을 열고 부활한 셈이다. 그런데 대통령에 대한 심기 경호가 강화될수록 정권은 민심과 더 멀어진다. 이 사실은 그동안 우리가 경험한 역사의 교훈이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