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40년

기고 - 유신을 쿠데타라 부르는 이유

2012.10.16 22:22
김재홍 |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40년 전 오늘 대통령 박정희는 저녁 7시 방송을 통해 비상계엄령과 국회 해산을 선언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헌법상 누구에게도 국회 해산권은 없다. 국회를 초헌법적이고 불법으로 해산한 것이다. 더구나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한 다음날 중앙정보부와 군 수사기관은 미운 털이 박힌 야당 의원 20여명을 일시에 잡아들여 잔혹하게 고문 폭행했다. 각목 구타와 물고문은 보통이었고 이른바 통닭구이라 불리는 비인간적 만행을 가했다. 당시 끌려갔던 조연하, 최형우, 강근호 의원 등이 1975년 2월28일 합동기자회견에서 생생하게 증언했다.

유신헌법은 비상국무회의가 의결해 국민투표에 부쳤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의회가 아니고는 입법권을 갖지 못함에도 박정희는 자신이 임명한 국무회의에서 독재헌법안을 통과시켰다. 유신헌법이 사문서에 불과하며 그래서 유신체제는 ‘헌법부재의 시기’였다는 지적이 나오는 근거다.

[유신 40년]기고 - 유신을 쿠데타라 부르는 이유

유신헌법 국민투표는 비상계엄 상황에서 찬반토론이나 언론의 비판적 보도도 일절 금지된 가운데 강행됐다. 유신헌법이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고 강변하는 것은 박정희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99.9% 지지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자랑하는 것이나 똑같다.

유신체제에서 박정희는 연임 제한도 없고 긴급조치권까지 가졌다. 또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실질적으로 임명하고 대법원장을 포함한 법관 임명권도 가졌다. 삼권이 박정희 1인에게 집중된 절대권력 체제였다.

유신체제 수립은 나라를 자기 사유재산쯤으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감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언론은 재갈 물린 상태였고 국민투표도 공무원, 군인, 관변단체들이 개입한 관권, 부정이 횡행했다. 그것은 정치권력만이 아니라 국민주권과 사회저변까지 뒤엎은 사실상의 내란이었다.

5·16이나 유신 쿠데타는 당시 시대상황 때문이 아니라 박정희 자신의 권력욕의 산물이었다. 그는 1952년 이미 이종찬 당시 육군참모총장에게 ‘군사혁명’을 종용했다가 질책당한 바 있다. 10년 이상 쿠데타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가 4·19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나라가 어지러워서 나선 ‘구국의 결단’이라는 강변은 터무니없는 역사왜곡이다.

유신체제는 박정희가 권력욕을 노골화한 최종 목표였다. 5·16 쿠데타 때 군대복귀를 공약했지만 식언하고 정치 일선에 나섰으며, 1969년 3선개헌 때 한 번만 더 하겠다고 했으나 유신으로 종신집권 1인체제를 강행했다.

“절대권력은 절대 타락한다”는 금언을 실증해 보여준 것이 1979년 10·26사건이었다. 그는 권력 행사에서처럼 사생활에서 누구의 견제도 허용하지 않았다. 당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은 그가 사흘에 한 번꼴로 외부 여성이 동석한 술자리를 가졌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박정희는 18년 집권하면서 7번 이상 군대를 동원했으며 군부에 하나회를 친위대로 육성했다. 10·26으로 비록 그가 사라졌지만 하나회에 의한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은 엄혹한 복고반동을 불러왔다. 유신체제는 종식되지 않고 전두환, 노태우 등 하나회에 의해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로 이어졌다.

나는 유신체제 아래서 저질러진 모든 체제폭력에 대해 2013년 새 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해 공식 사과할 것을 제안한다. 나치의 죄과에 대해 후대의 서독 민주정부가 사과했듯이, 제주 4·3사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 사과한 것처럼 과거사를 정리해야 더 이상의 소모적 논란이 사라질 것이다. 인권탄압의 피해 당사자뿐 아니라 모든 국민과 역사 앞에 사과해야 과거 청산이 가능하다. 그것을 공약화하고 국민 합의를 이끌어내는 후보에 대한 지지운동이 벌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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