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정체성 정치’의 함정

2018.08.08 20:40 입력 2018.08.08 22:12 수정

8월3일부터 8일까지 ‘경력증진 캠프’라 이름하여, 우석대 학생들을 인솔하여 뜨거운 타이완에 갔다. 이번 캠프는 강제연행자 유골문제를 다루는 ‘평화의 디딤돌’과 함께했다. 타이베이에서 이틀간, 장제스(蔣介石) 통치시기의 국가폭력의 현장을 답사하고, 8월5일부터 남부의 핑둥현(屛東縣) 리나리(禮納里) 루카이족 원주민 마을에서 일본과, 타이완의 젊은이와 함께 ‘원주민을 향해 새롭게 아시아를 배운다’라는 주제로 공부했다.

[동서남북인의 평화찾기]타이완 ‘정체성 정치’의 함정

공산당과의 내전에 패배하여 ‘무능·부패’로 낙인찍혀 미국의 지지를 잃어버린 장제스는 1949년에 타이완으로 도주하여 계엄령을 선포했다. 6·25전쟁 발발로 미국의 지지가 회복되어 ‘기사회생’한 장제스는 타이완의 통치기반을 굳히기 위해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1950년대 백색테러)을 벌이고, 계엄을 무기한 연장하여, 국민당 외의 정당 금지(黨禁), 언론통제(報禁)를 실시했다. 이 독재체제가 무너지는 계기가 된 것은 미국의 비호 아래 중국 국토의 0.3%에 지나지 않는 타이완의 국민당정부가 중국 전체를 대표하는 정통정부로 유엔상임이사국의 자리를 차지한 부조리에 많은 나라들이 반발하여, 1971년 유엔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대표권 귀속문제’를 표결에 부친 사건이다. 참석한 128개 회원국 가운데 찬성 76표, 반대 35표, 기권 17표가 나와 중화인민공화국은 안전보장이사회의 5대 상임이사국이 됐고, 타이완은 국가로서의 국제법적 지위를 사실상 박탈당했다. 그 결의안이 제2758호 ‘유엔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가지는 합법적 권리의 회복’이다.

국민당은 마지막 보루가 된 타이완에 비로소 눈을 돌려 ‘10대 건설 프로젝트’를 내놓고 중화민국의 ‘타이완화’에 나섰다. 인구의 90% 가까이를 차지하는 1945년 이전부터 타이완에서 살던 본성인(本省人)을 통치의 대상에서 정치의 주체로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장제스의 사망(1975년)과 그 아들의 사망(1988년)으로 관료 출신의 본성인 리덩후이가 총통으로 취임하게 되었으며, 38년간 계속되어 온 계엄이 해제되어 민진당이 결성됨으로써 민주화의 열망은 누를 수가 없게 되었다. 국민당이 몰락한 후 2000~2008년 집권한 민진당은 2016년에도 재집권하여, 타이완 정치의 다양화가 이루어졌다.

그동안 본성인은 국민당 독재에 반감과 증오를 쌓아왔는데, 그 감정이 반(反)중국·친일·친미의 타이완 정체성의 특색을 만들었다. 민진당은 ‘하나의 중국론’을 부정하고 타이완의 독립을 주장하게 되어, 2006년에는 타이완의 이름으로 유엔가입을 주장하기도 했다. 중국사람과 타이완사람으로 나누어 그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지지자를 결속시키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에 공들여, 중국혐오를 부추겼다. 이른바 ‘타이완 정체성’ 만들기이다.

오늘날 타이완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약 500년 전쯤부터 타이완의 대안인 후젠에서 건너온 중국인의 자손이 주종을 이루고, 타이완어라고 주장하는 말은 후젠 남부에서 쓰이는 민난어이며 생활풍습도 거의 동일하다. 그래서 타이완인이 중국인과 다른 독자적 종족임을 강조하기 위해 타이완인은 수백년 동안 원주민들과 혼혈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종족이 되었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약 500년 전에 대륙에서 사람들이 밀려 들어오기 전에 원주민은 타이완에 500만명 정도 살았다고 하는데 이주자들에게 토멸되어 산지로 쫓겨나고 지금 겨우 50만명 정도 남았다고 한다.

일제는 광활한 조사사업을 통해서 방대한 타이완 번족(蕃族) 조사자료를 작성하고, 산지에 살며 고유문화를 유지하는 생번(生蕃)과 한인과의 혼혈과 동화가 진행되어 독자성을 상실한 숙번(熟蕃)으로 분류했다. 해방 후 국민당정부는 그들을 각각 고산족 또는 산포(山胞)로 부르고 후자를 핑푸(平 )족이라고 불렀다. 1990년대에 원주민들의 권리운동이 크게 신장하여 스스로 ‘원주민’으로 부를 것을 주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평지에 살던 원주민은 문화적으로도 소멸되었는데도, 2017년 타이완 국회는 원주민 신분법을 개정하고, 일찍이 침략·약탈의 대상이었으며 문화적으로 소멸한 평지 원주민, 핑푸족을 억지로 독립된 족군(族群)으로 인정했다. 과거에 후젠에서 건너온 농민은 거의가 독신자라서 원주민 여성을 겁탈하거나 약취한 결과 타이완 주민의 70%가 핑푸족의 피를 이어 받았다고 하면서, 그 어두운 성적 약탈의 역사를 마치 이민족 간의 아름다운 융합처럼 미화하고 ‘타이완 정체성 만들기’의 논거로 삼으려 하고 있다.

타이완 정체성 세우기의 핵심은 중국사와의 연관성을 극소화하고 타이완의 독자성을 강조하려는 역사교과서 만들기에 있다. 그들은 중국을 대만에 대한 침략자로 묘사하고, 일제를 문명전파와 근대화의 은인으로 묘사하고, 가치 중립을 주장하면서 광복을 전후하여 일제를 일본, 청일전쟁을 일청전쟁, 연대를 일본식으로 명치 몇년으로 부르는 것이 공정하면서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 친일로 자기들의 정체성을 오히려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왜곡된 역사교육은 리덩휘(李登輝)가 총통으로 있던 1997년에 제정된 ‘인식타이완’에서 비롯된다. ‘인식타이완’은 중학교용 지리, 역사, 사회의 교과서인데, 타이완의 독자성을 강조한 역사편이 주목을 받았다. 그 후 20년의 세월이 흐르고 일찍이 국민당에 의해 강요된 타이완을 무시한 ‘중국사’에 의한 역사교육의 부당성의 인식이 공유되었는데, 그 반동으로 타이완을 침략하고 식민지 통치를 실시한 침략자인 일제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역사의 왜곡을 가져왔으며, 타이완 민주화운동 속에서 지향해 온 가치와도 충돌하는 것이다. 리덩후이 총통은 일찍이 “나는 스무 살까지 일본인이었다”고 식민지 지배의 합법성을 긍정하고, 필리핀 마닐라 시가전에서 일본군인으로 죽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형을 찾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여, 형을 합사해준 일본 천황폐하의 ‘일시동인’(一視同仁: 모두 천황의 아기로서 똑같이 사랑함)에 감읍하기도 했다. 타이완인의 ‘정체성 바로 세우기’에 진정 필요한 것은 이러한 맹목적인 친일성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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