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미경중 30년’, 시험대 선 한·중 관계

1992년 8월24일 이상옥 당시 외무장관과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이 베이징 조어대 국빈관에서 ‘한·중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서’를 교환한 뒤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1992년 8월24일 이상옥 당시 외무장관과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이 베이징 조어대 국빈관에서 ‘한·중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서’를 교환한 뒤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새로운 관리는 옛 장부를 외면할 수 없다.”(중국 외교부 대변인)

“새 정부가 챙겨야 할 옛날 장부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주중 한국대사관 고위 관계자)

최근 한·중 간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문제를 두고 ‘옛 장부’ 논란이 벌어졌다. 중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 이른바 ‘사드 3불’ 정책의 유지를 요구하며 옛 장부라는 표현을 들고 나왔다. 사드를 추가 배치하지 않고 미국 미사일방어(MD) 체계에 참여하지 않으며 한·미·일 군사동맹을 추진하지 않는다는 문재인 정부의 입장 표명이 중국에 대한 약속 내지는 양국간 합의인 만큼 새 정부도 이를 이행해야 한다는 취지다. 반면 한국 정부는 사드 3불은 약속이나 합의가 아니라 단순한 입장 표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갚아야 할 장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사드는 한·중 관계의 복잡성이 응축된 문제다. 양국 관계 뿐 아니라 미·중 전략 경쟁과 북한 문제 등이 모두 얽혀 있기 때문이다. 사드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자위적 방어 수단이며 제3국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게 한국 정부 입장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미국이 한국에 사드를 배치함으로써 중국의 전략적 안보를 해치려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5년 전 봉합됐던 사드 갈등이 한국의 정권 교체와 사드 기지 정상화 추진으로 다시 한번 양국 관계의 잠재적 뇌관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한·중 관계는 수교 30주년(24일)을 맞아 새로운 시험대에 서 있다. 양국 사이에 놓여 있는 난제는 비단 사드 문제만이 아니다. 격화된 미·중 갈등 속에서 한·미 동맹 강화를 표방한 윤석열 정부의 출범으로 한·중 관계는 또 한번 변곡점을 맞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미·중 간 전략 경쟁 하에서 ‘전략적 모호성’과 ‘균형외교’를 포기하고 한·미 동맹을 경제안보와 글로벌 현안까지 아우르는 가치 기반의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확장해 나가기로 했다. 이는 곧 한·중 관계의 불확실성 증대로 이어진다. 수교 3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그동안의 한·중 관계를 되돌아 보고 새로운 방향 설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굴곡진 30년, 경제협력 성과에도 질적 발전 못 이뤄

돌이켜 보면 한·중 관계는 수교 이후 지난 30년 동안에도 순탄한 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었다. 1992년 8월 전격적으로 이뤄진 한·중 수교는 냉전 종식 이후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한국과 톈안먼(天安門) 사태에서 비롯된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개혁개방 흐름을 가속화하고자 했던 중국의 이해 관계가 맞물린 결과물이었다. 이후 30년 동안 양국 관계는 협력 동반자 관계(1998년)에서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2003년), 그리고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2008년)로 발전했다. 수교 30년의 가장 큰 성과는 경제 협력과 인적 교류의 확대였다. 1992년 63억8000만달러 수준이던 양국 간 연간 교역액은 지난해 3015억달러로 47배 넘게 증가했다. 수교 당시 한 해 13만명에 불과했던 양국 간 상호 방문자 수도 코로나19 이전에는 1000만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한·중 관계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에 걸맞는 질적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그만큼 양국 관계에는 굴곡이 적지 않았다. 2000년 한국이 국내 농가의 피해를 막기 위해 실시한 긴급수입제한 조치로 불거진 ‘마늘분쟁’, 2002년 시작된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한 역사 왜곡 갈등,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 문제 등은 양국 관계를 경색기로 이끌었다.

북한 문제로 인한 갈등도 많았다.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 당시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대북 제재와 규탄 성명 채택을 무산시켰고, 최근 북한의 잇단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양국이 동반 성장을 꾀했지만 외교·안보 현안에 있어서는 끊임없이 갈등과 이견을 노출해 온 것이 지난 30년의 한·중 관계였다.

최근 10년은 한·중 관계가 ‘롤러코스터’를 탄 시기로 볼 수 있다. 2013년 취임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이듬해 7월 북한에 앞서 한국을 먼저 방문하며 양국 관계에 훈풍을 몰고 왔다. 2015년 9월에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서방 지도자들이 보이콧한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해 시 주석과 나란히 톈안먼 망루에 오르며 양국 관계는 절정으로 치닫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2016년 한국 정부의 사드 배치 결정으로 양국 관계는 급전직하했다. 중국은 ‘한한령’(한류 제한령) 등 경제 보복으로 응수했고,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인 2017년 10월 양국이 ‘한·중 관계 개선 관련 협의 결과’를 발표하며 갈등을 봉합했지만 여전히 그 불씨가 남아 있는 상태다.

‘안미경중’에서 ‘안미경세’로, 한·중 관계에 놓인 난제들

지난 30년 순탄치 않은 여건에서도 그나마 양국 관계를 지탱해 온 것은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한국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였다. 30년 동안 한국 정부는 진보와 보수 정권을 막론하고 안미경중이라는 대외정책의 기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미·중 전략 경쟁의 심화는 한국 정부에 쉽지 않은 선택의 고민을 안겼다. 문재인 정부가 추구했던 ‘균형외교’는 지속하기 힘든 ‘줄타기 외교’라는 비판을 받았고, 지난 5월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한·미 동맹 강화를 선택하며 사실상 ‘안미경세(안보는 미국, 경제는 세계)’로 대외정책 기조를 전환했다.

한국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 변화는 곧 한·중 관계의 재설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윤 대통령은 지난 5월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우리는 경제가 안보고 또 안보가 경제인 경제안보 시대를 살고 있다”며 “한·미 동맹도 경제 안보 시대에 맞춰 발전하고 진화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양국 정상은 한·미 동맹을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격상하는 데 합의했다. 한국 정부는 곧 이어 대중국 견제 성격의 경제협의체로 평가되는 미국 주도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출범에 참여했고, 윤 대통령은 지난 6월 한국 정상으로는 처음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에도 참석했다. 최근 한국 정부는 중국이 자국에 대한 공급망 배제 시도로 인식하는 미국 주도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 ‘칩4’ 예비회의에도 참여하기로 했다.

윤석열 정부가 보여온 일련의 행보는 중국 입장에서 보자면 자국을 겨냥한 미국의 디커플링(탈동조화)과 공급망 배제 시도에 한국이 동참하려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중국은 실제 “디커플링에 반대하고 글로벌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면서 한국의 IPEF나 칩4 참여를 우회적으로 견제해 왔다. 한국 정부는 중국을 배제하려는 것이 아니며 중국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겠다는 입장이다. 윤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지난달 외교부 업무보고에서 “중국이 오해하지 않도록 적극적인 외교를 하라”고 직접 주문하기도 했다.

사드 문제는 IPEF나 칩4 가입과는 또 다른 성격의 양국 현안이다. 한국은 이를 안보 주권에 관한 문제로 보고 있고 중국도 자국의 안보와 직결되는 사안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경북 성주 사드기지의 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은 최근 사드 3불에 더해 운용 제한을 의미하는 ‘1한(限)’까지 거론하고 나섰다. 상호 간에 양보나 타협 불가 사안으로 인식하는 사드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느냐는 향후 한·중 관계의 중요한 시금석이 될 수 있다.

장기적 관계 설정, 안정적 관리 절실

장기적으로는 미·중 간 전략 경쟁 심화와 가시화되는 ‘신냉전’ 구도 속에서 양국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이기현 한국외대 LD학부 교수는 지난 20일 열린 ‘인차이나포럼’에서 “한·중 관계는 양자 차원의 노력과 달리 글로벌 차원의 미중 경쟁 심화와 경제, 안보, 가치·이념의 디커플링 현상으로 의도치 않은 오해와 반목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미·중 전략 경쟁 심화와 블록화는 한국의 의도와 관계없이 중국이 한국을 안보위협으로 인식하게 될 가능성을 높인다”고 진단했다. 이어 “중국은 한국이 미국의 블록에 동참해 자국을 위협한다고 인식하면 경제적 카드를 통해 한국을 고통스럽게 할 것”이라며 “미·중 전략 경쟁은 군사안보, 과학기술, 경제무역 등 전방위에 걸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대미 편승은 제2의 사드 사태로 비화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고, 한국은 미·중 블록화 대응 과정에서 양자 선택의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이달 초 발간한 ‘이슈와 논점’에서 “미·중 전략경쟁의 격화와 불안정한 국제정세로 한·중 관계의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고, 윤석열 정부 출범으로 인한 양국 관계 약화 가능성도 제기된다”며 “한·중 관계의 안정적 관리가 더욱 절실해진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양국이 가치 기반의 상호존중 원칙을 지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상호 불필요한 오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전략적 소통을 유지·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한·중 관계의 쟁점이 주로 안보·외교적 현안에 집중돼 있는 만큼 경제와 외교, 북핵 문제 등의 현안을 분리 대응하는 ‘투트랙 접근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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