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기 ‘훈풍’ 예고 속 정치적으론 ‘역풍’ 걱정되는 한 해

2018.01.26 16:53 입력 2018.01.27 11:47 수정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가상통화로 신흥 갑부 반열에 오른 벼락부자 이야기가 아니다. 코스닥에서 될성부른 대장주를 미리 알아본 덕에 여유 있는 노년을 예약한 투자자들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에 이어 새해에도 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세계경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도처에서 샴페인이 터지고 있다.

지나 2일 개장한 뉴욕 증시가 신년 벽두부터 세계 증시가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지난 8일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중개인들이 주문을 넣고 있다.  뉴욕 | 로이터연합뉴스

지나 2일 개장한 뉴욕 증시가 신년 벽두부터 세계 증시가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지난 8일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중개인들이 주문을 넣고 있다. 뉴욕 | 로이터연합뉴스

■ 세계경제 동시 호황, 미국 사상 최장기 성장 전망도

뉴욕 증시를 필두로 전 세계 주식시장은 최고기록을 경신하며, 상승 장세의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세계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 1300여명을 상대로 한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PwC)의 연례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57%가 올해 세계경제가 성장할 것이라고 답했다. 87%는 자신들의 기업이 성장할 것이라고 낙관했고 이 중 42%는 “매우 확신한다”고 답했다. 지난해 38%에서 올라간 수치다. 당연히 올해 세계경제 전망도 밝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22일 수정 전망에서 올해와 내년 세계경제성장률을 3.9%로 0.2% 상향 조정했다.

특히 미국 경제의 낙관론이 주목된다. 월가에서는 사상 최고의 장기호황으로 기록됐던 1990년대 10년 호황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세계경제가 더디지만 견고한 성장세를 시작한 것은 금융위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2009년 중반부터다. 2019년 중반을 넘기면 최고기록을 세운다. IMF는 미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을 2018년 2.7%(종전 2.3%), 2019년 2.5%(종전 1.9%)로 올렸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세법개정이 2020년까지 미국 경제에 1.2%의 성장동력을 줄 것으로 분석했다. 유럽의 경제성장률도 올해 2.2%, 내년 2%로 각각 0.3% 올려 잡았다. 유로존 탈퇴(브렉시트) 협상 탓에 불확실성이 높은 영국 경제성장률만 0.1%를 낮춰 1.5%로 잡았다. 스위스 다보스에서 23일(현지시간) 개막한 제48차 세계경제포럼(WEF)에 참석 중인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모든 신호가 올해와 내년에 모두 추가 성장이 있을 것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일기예보와 경제예측의 공통점은 두 가지 모두 확신에 가까운 전망을 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맑은 날이 예상돼도 강우확률을 조금이라도 더해야 안심이 되는 식이다. 하지만 작금의 세계경제 전망에는 딱히 불황을 경고할 만한 악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고민인 것 같다. 매년 12월 민간부문 경제전문가들을 상대로 경기전망을 내놓고 있는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다음 미국 대선(2020년)까지 불황이 올 확률은 50%에 미치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가능성이 높음을 추론할 수 있는 근거의 하나다. 불황이 올 확률은 2018년에 14%, 2019년까지 2년 동안 29%, 2020년 말까지 3년 동안 43%로 전망됐다. 이는 트럼프가 돌풍을 일으키던 미국 대선 직전인 2016년 10월 조사에서 이코노미스트들이 다음 대선까지 향후 4년 내 불황이 올 확률을 58%로 보았던 것에 비해 낙관론이 크게 늘어났음을 말해준다.

■ 트럼프의 미국, ‘정치는 암울·경제는 쾌청’의 모순 계속될 듯

시장은 트럼프 1년의 경제성적도 후하게 매기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이 인터뷰한 이코노미스트들은 트럼프의 재임 기간이 짧아 조심스러워하면서도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8년보다 높은 점수를 주었다. 작년 1월 퇴임을 앞둔 오바마 행정부는 금융 안정성 부문에서만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일자리 창출 부문에서는 긍정적 또는 중립적 평가를, 국내총생산(GDP) 성장에는 부정적 또는 중립적 평가를 받는 데 그쳤다. 장기적 성장 잠재력은 부정적이었다. 반면에 트럼프 행정부는 일자리 창출과 GDP 및 증시 성장 부문에서 다소 또는 강한 긍정 평가를 받았다. 장기 성장 전망에서도 중립적 또는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금융시장의 안정성에서는 저널이 인터뷰한 전문가 대부분이 중립적 평가를 내렸다. 트럼프는 세제개혁에 뒤이어 향후 10년간 1조7000억달러(약 1810조원)를 투입하는 대규모 인프라투자로 경기를 부양한다는 복안이다. 정치는 엉망인데 경제는 잘 나가는 모순이 장기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세계경제포럼이 개막한 23일 포럼 장소인 스위스 다보스 당국이 시위를 불허함에 따라 제네바 시내에서 열린 반 다보스, 반 세계화 시위에 참석한 사람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의 캐리커처에 “나가라”라고 쓴 피켓을 들고 있다.  제네바 | 로이터연합뉴스

세계경제포럼이 개막한 23일 포럼 장소인 스위스 다보스 당국이 시위를 불허함에 따라 제네바 시내에서 열린 반 다보스, 반 세계화 시위에 참석한 사람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의 캐리커처에 “나가라”라고 쓴 피켓을 들고 있다. 제네바 | 로이터연합뉴스

세계경제 동시 호황과 함께 붙어다니는 말이 정상화(normalization)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 동안 역사상 기록적인 저금리를 정상화하고, 양적완화 조치 등의 비상조치를 철회하고 정상으로 복귀하는 시기라는 말이다. 세계경제 호황의 원인으로는 여러가지가 제시되지만 가장 큰 원인은 ‘쉬운 돈’ 덕분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머리 옵스트펠트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전 세계의 동시 성장은 쉬운 돈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극도로 더딘’ 금리 인상을 하고 있는 연준과 경기부양을 위해 푼 돈을 아직 거둬들이지 않고 있는 유럽중앙은행을 배경으로 지목했다. 그 돈을 회수하는 정상화 과정을 얼마나 무리 없이 해내느냐는 것이 새해 세계경제의 관건인 셈이다.

■ 글로벌리스트 대 포퓰리스트, 갈수록 스텝 꼬이는 세계화

세계가 올해 직면할 ‘비경제적 위협’은 어느 해보다 심각하다. 금융위기가 초래한 사회적·정치적 위기가 역으로 경제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자유주의 세계질서는 갈수록 흔들리고 있다. 세법개정안을 통과시킨 트럼프는 그동안 미국에만 불리했던 운동장을 평평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신년 벽두부터 무역전쟁을 시작했다. 태양광 제품과 세탁기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발동이 포문이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이끄는 유럽연합(EU)이 글로벌리스트의 가치를 추구하지만 보호무역으로 가는 미국, 불공정 교역 관행의 중국을 견제하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기성제도에 대한 실망과 불신, 엘리트들에 대한 반감에서 불이 붙은 포퓰리즘은 트럼프의 미국과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 주요국에서 주요 정당으로 성장했다. 헝가리·폴란드를 비롯한 중·동유럽 국가들과 터키 등에서는 권위주의 정부가 민족주의의 망령을 불러오고 있다. 오는 3월 총선과 대선을 앞둔 이탈리아와 러시아에서 다시 확인될 현상이다. 이탈리아에서는 극우 오성운동이 기세를 올리고 있고, 러시아 대선은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아닌, ‘푸틴을 뽑는 선거’라는 비아냥을 받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중국은 지난해 19차 당대회 이후 권력을 더욱 집중시키고 있다. 국가 단위별 민족주의가 확산되고 있다면, 국가 내에서는 집단과 집단이 무한대치하는 ‘부족주의’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남북전쟁 당시의 상징을 들고 싸움을 벌이는 트럼프의 미국뿐만이 아니다. ‘태극기’와 ‘촛불’이 부딪히는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올해 다보스 포럼이 주제를 ‘파열된 세계에서 공유미래의 창조(Creating a Shared Future in a Fractured World)’로 잡은 까닭이다.

■‘양적완화’의 경제정책에 이어 ‘질적완화’의 사회계약?

클라우스 슈밥 다보스 포럼 회장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된 10년 전 위기 탈출을 위해 각국이 양적완화 정책을 취했던 것처럼, 지금은 ‘질적완화(qualitative easing)’의 새로운 사회계약을 체결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갈수록 줄어드는 기성제도에 대한 신뢰, 급속한 기술변화와 저변에 깔린 불평등은 경제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위기라는 진단이다. 슈밥 회장은 “질적완화를 재계가 중심이 되어서 펼쳐나가자”고 제안했지만, 제안의 한계를 벗어날 것 같지는 않다. 결국 세계정치로 풀어야 할 글로벌 현안이지만 국제사회의 리더십이 더욱 불투명해지는 상황에서 해결의 주체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다보스발 기사에서 두 가지 지표를 증거로 들었다. 스위스의 글로벌 트레이드 알럿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적으로 다른 나라에 고통을 안긴 정부 차원의 조치는 642개에 달했다. 2010년에 비해 95% 높아진 규모다. 미국은 지난해 143개의 악성 교역조치를 취했다. 2016년에 비해 59% 늘어난 것이다. 에어매트리스에 대한 미국의 관세에서부터 클라우드 컴퓨터산업에 대한 중국 정부의 재정지원 등을 망라했다. 두 번째 지수는 자유의 퇴조다. 미국 프리덤하우스에 따르면 지난해 71개국에서 자유가 퇴조한 반면에 35개국에서만 자유가 확산됐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여유 있게 토론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들이다. 올해 다보스 포럼에서는 다소 생경한 위협이 추가됐다. 포럼 참석자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위협으로 대량살상무기(WMD)의 사용, 즉 전쟁이 꼽혔다. 사이버 공격에 대한 우려도 높아졌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전쟁 위협으로 군사적 충돌과 관련해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 고려하고 있는 일방적인 행동과 사우디와 이란의 전쟁에 미국이 연루되는 것 및 미·중 간의 높아지는 긴장을 예시했다. 설문 응답자의 93%가 국가들 간의 정치적, 경제적 갈등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79%는 군사적 충돌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고 답했다. 78%는 큰 나라들이 지역 분쟁에 연루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경제적으론 호황이 예상되지만, 정치적으론 더 위험한 해. 세계의 엘리트들이 전망한 2018년의 기상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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