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인가, 조일전쟁인가

2004.06.02 18:55

조선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 뼛속에 파고든 원한의 감정을 지니게 된 배경은 까마득한 옛날로 돌아간다. 곧 1592년 조선 침략을 도발한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이 침략전쟁은 무려 7년 동안 전개되었으며 평화로운 강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명나라는 조선의 거듭되는 지원 요청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명나라는 일본군이 압록강 이남을 차지하면 곧바로 명나라 지경을 넘볼 것이라는 위기 의식으로 지원병을 보낸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조선 조정에 “명나라를 정벌할 터이니 길을 빌려달라(假道)”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명 조정에서는 조선이 옛 고구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을 끌어들여 합동으로 명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우려도 일어났다. 이렇게 하여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외국 지원군대가 파견된 기록을 세웠다.

[한국사 바로보기] 임진왜란인가, 조일전쟁인가

명은 적당한 선에서 일본군과 강화교섭을 벌였다. 조선 대표는 옵서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자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강화교섭을 반대하고 철저 항전을 외치면서 수복작전을 벌였다. 한국전쟁 시기 정전회담을 반대하면서 북진통일을 외친 이승만과 너무나 흡사하였다. 강화회담 교섭 과정에서 도요토미는 조선의 팔도를 분할해 네 도와 서울을 조선에 돌려준다는 조건을 달았다.

곧 경상·전라·충청도와 경기도 일부를 차지하고 한강 이북의 경기도와 서울과 강원·평안·함경도를 돌려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이 제의는 묵살되었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외국끼리 조선 땅을 분할하려는 논의가 벌어진 것이다.

- 사상첫 외국군 주둔사례 -

전쟁는 승패없이 싱겁게 끝났다. 종전에 따라 치르는 항복식이나 강화식도 없이 그저 두 나라 군사들이 철수하는 것으로 끝이 났으니 인질교환이나 배상논의도 없었다. 가장 큰 피해 당사자는 조선 민중이었다.

전쟁의 실상을 목격한 이수광은 “세상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서 여자와 어린애들은 마음대로 바깥 출입조차 못할 형편이었다. 굶어죽은 시체가 쌓이면 사람들이 다투어 그 시체의 살을 떼어먹었다”(지봉유설)고 기록하였다.

어쨌든 전쟁이 끝난 뒤, 명나라가 망해 가는 조선을 구원하였다 하여 자소(字小) 재조(再造)의 은혜, 곧 작은 것을 사랑해주고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를 갚으려는 의식이 팽배하였다. 명나라가 과연 조선의 보존을 위해서 지원군을 보냈던가? 어디까지나 자국의 안정을 위해 개입하였던 것이다.

명나라는 한 때 “조선을 중국의 한 주로 편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이를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입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맹목적 사대모화사상이 조선을 휩쓸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 역사는 이 전쟁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했다. 곧 “임진년에 일어난 왜군의 난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왕조시대에는 연호나 왕의 재위 연대를 표시하고 간지를 써서 사건 내용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역사 기록을 남겼다. 이를 기년체(紀年體)라 부른다. 기년체 방식의 기록은 역사적 사건의 정의를 규정하는 바른 역사용어를 사용하는 데 한계를 지녔다.

[한국사 바로보기] 임진왜란인가, 조일전쟁인가

해방 뒤 이를 별 생각없이 수용하였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갑자사화·을미사변 등의 역사용어가 수없이 등장하였다. 임진왜란의 경우 그 의미를 따져보자. 동양권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간지는 60년마다 다시 돌아오는 연대 표시 방식이다. 그러니까 임진년은 60년을 주기로 하여 반복된다. 따라서 역사용어에 간지를 붙이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또 “왜구가 일으킨 변란”이라는 용어 사용도 비과학적이다. 그 사건은 세계전사에도 기록된 엄연히 국가끼리 벌인 전쟁이었다. “왜란”이라 부르게 되면 그 실체에 접근할 수 없게 된다. 일본은 엄연한 국가 실체이므로 왜구로 대표될 수 없을 것이다.

- “시체의 살 떼어먹었다” -

일본에서는 전쟁이 진행되는 시기의 일본 연호인 문록(文祿)과 경장(慶長)의 앞 글자를 따오고 전쟁의 뜻을 담은 역(役)을 붙여 사용하였다. 이 역시 일본 고유의 연호를 사용한 탓으로 객관적 용어가 될 수 없다.

근래 일본의 진보 학자들은 “조선침략전쟁”이라 부른다. 어느 정도 객관적 용어이기는 하나 일본 중심의 용어라는 점에서 논란이 될 수 있다.

북한에서는 “임진조국전쟁”이라 한다. 임진년에 조국 수호를 위해 벌인 전쟁이라는 뜻이다. 그 도발자가 일본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으며 조국이라는 극단적 용어를 사용하여 국수주의적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중국에서는 예전에는 대체로 “임진동정(壬辰東征)”이라 명명하였다. 조선을 자기네 속국으로 보고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동쪽을 정벌해 구제하였다는 뜻을 담고 있다. 더욱 사리에 맞지 않는 용어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봉건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민주가치의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역사용어에 비합리적인 간지를 접두사에서 떼어내고 그 정당한 과학적 용어를 선택하여 역사용어로 삼아야 한다. 그런 시대 정신의 의미에서 필자는 통사인 ‘한국사 이야기’에 임진왜란의 용어를 버리고 ‘조일전쟁’이라 붙였다. 곧 조선과 일본이 벌인 전쟁이라는 뜻이다. 이 역사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세계전사의 보편적 객관성을 수용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용어만 보고도 그 실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1636년 청나라의 침입으로 전쟁을 벌인 사건도 ‘조청전쟁’이라 명명하였으며 갑오년에 일어난 농민전쟁도 ‘동학농민전쟁’으로 바꾸어 불렀다. 오늘의 우리는 바른 용어를 선택하여 역사의 실체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이제 근현대 역사의 과학적 접근을 위해 봉건왕조를 옹호하거나 합리화하는 용어를 버려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한국전쟁이 일어난 6월을 맞이하면서 시대배경은 다르나, 그 과정이 너무도 유사한 조일전쟁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그 바른 용어를 선택하는 것은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이이화 역사학자〉

- ‘강간’ 허용한 日軍 전후까지 큰 후유증 -

조일전쟁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군인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현지처를 허용하는 군법을 시행하였다. 일본군들은 마을에 들면 처녀나 부인을 가리지 않고 조선 여자를 납치하여 데리고 갔다.

여성들은 완강하게 항거하다가 칼에 팔이 잘리거나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 절벽에 투신하는 일들도 벌어졌고, 강간을 당한 뒤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일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들 여성이 임신을 하면 “왜놈의 씨를 뱄다”면서 손가락질을 받았다. 더러 깊은 산골로 들어가 출산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거의 사회와 가정의 시린 눈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 일쑤였다. 더욱이 전쟁이 끝난 뒤 사대부가에서는 이들 여성에게 자살을 강요한 뒤에 열녀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조금 나은 경우 가정에서 내쫓아 멀리 도망쳐 살게 하기도 하였다.

[한국사 바로보기] 임진왜란인가, 조일전쟁인가

정작 사회문제를 야기한 것은 포로로 잡혔다가 귀환한 여성들에 대한 처리였다. 화의 교섭에 따라 1,500여명이 일본에서 귀환하였다. 이런 아내를 둔 벼슬아치와 사림들은 이혼을 허가해달라고 빗발치게 요청하였다.

사헌부는 “몸을 더럽힌 지어미는 시가에 큰 의리를 끊은 것이니 어찌 다시 결합해서 그 부모를 섬기며 조상의 제사를 받들 수 있겠는가”(인조실록 16년)하며 이혼을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선조는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며 허락해 주지 않았다.

사대부의 이혼은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이뤄졌다. 이들은 비록 이혼은 면하였으나 골방에 유폐되어 살았다. 능욕을 당하거나 포로로 아내와 딸을 잃은 집안과는 혼인을 하지 않는 풍조가 일어났다. 중매쟁이까지도 외면하였다.

선조는 다시 “이런 풍조라면 온 나라의 큰 집안이 거의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며 “종실과 척족들이 이들과 혼인해서 모범을 보이라”(인조실록 16년)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 풍조가 쉽사리 사라질 리가 없었다.

전쟁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계층이 여성일 것이다. 적잖은 여성들이 피임약도 없는 현실에서 아이를 낳은 경우가 많았을 것이요, 그렇게도 증오하던 ‘왜놈 씨’와 ‘뙤놈의 씨’는 알게 모르게 조선 민족의 피에 섞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민족을 단일민족이라고 그 순수성을 주장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을 것이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