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5·3 인천사태

2004.09.05 17:13

1985년의 2·12총선은 전두환 정권의 분수령이었다. 김영삼·김대중을 비롯한 야권의 핵심 정치인을 구태정치인으로 묶어놓고 TV를 동원해 온갖 관권선거를 자행했지만,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공약으로 내건 신민당이 예상을 뒤엎고 제1야당에 올라서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어용야당 민한당은 창당한 지 고작 한달밖에 되지 않은 신민당에 흡수됐다. 이후 직선제 개헌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정국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실록민주화운동] (69) 5·3 인천사태

부산에 이어 3월30일 두 번째로 광주에서 개헌추진위 결성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여기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터졌다. 80년 5월의 끔찍한 살육이 있은 후 숨죽이고 있던 광주 시민들이 그 처절한 현장이었던 금남로를 가득 메운 채 민주화를 목청껏 외쳐댄 것이다. 개헌추진위 결성대회가 끝난 후에도 광주 시민들은 흩어질 줄 몰랐다. 이날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로 32명이 구속됐다.

이후 매주, 혹은 격주 단위로 열린 개헌추진위 결성대회가 태풍의 핵으로 등장했다. 민통련 지역조직의 협의체인 지역운동협의회는 즉각 이 결성대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가두시위로 발전시키기로 결정했다. 4월5일 대구, 4월19일 대전, 4월27일 청주에서 진행된 개헌추진위 결성대회에도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신민당의 공식적인 행사가 끝난 후 민통련 지역조직 주도의 가두시위가 이어졌다. 이제 관심의 초점은 5월3일로 예정된 인천대회였다. 수도권인 데다 대규모 공장이 밀집한 인천에서 열리는 개헌추진위 결성대회는 향후 정국의 향방을 판가름할 주요 승부처였다.

민주화운동 진영은 인천대회를 결전장으로 생각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심각한 노선갈등으로 인해 통일된 대오를 갖추지 못하고 정파별로 따로따로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민통련은 중앙위원회를 열어 대회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결정하고 구체적인 준비는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에 일임했다. 민통련은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신민당 등 야권과 연대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인사연은 신민당 행사가 끝난 후 시민회관 앞 4거리를 점거하고 민주헌법 제정을 요구하며 무기한 철야 연좌농성에 들어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평화적으로 농성을 진행한다는 방침 아래 피켓과 플래카드 이외의 시위용품은 준비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인사연의 이런 방침은 지나치게 낭만적인 것이었다. 경찰이 연좌농성을 방관할 리 만무했고, 경찰이 폭력을 행사할 경우 시위대가 당하고만 있을 리도 없었다.

노동운동권도 인천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85년 구로 동맹파업이 계기가 돼 출범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은 신민당 등 야권을 기회주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그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서노련과 인천노동운동연합(인노련)은 인천대회를 노동자가 독자적으로 정치세력화하는 결정적 계기로 보고 신민당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폭로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들은 신민당의 직선제 개헌 주장에 대해 민족민중민주헌법(삼민헌법) 쟁취로 맞섰고, 5월3일 “인천을 해방구로 만들자”고 선전했다.

학생들도 인천대회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그러나 85년 이후 가속화한 노선투쟁으로 말미암아 민족 모순을 중요시한 자민투 계열과 계급 모순을 강조한 민민투 계열로 갈려 통일대오를 꾸릴 수 없었다. 그 와중에 4월28일 전방 입소훈련 거부투쟁 과정에서 서울대생 김세진과 이재호가 분신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격앙된 학생들의 분노는 미국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4월29일 사태를 더욱 어렵게 하는 일이 터졌다. 신민당의 이민우와 민추협의 김대중, 민통련의 문익환 등이 야권 공동기구 회의를 열고 학생들의 반미·반핵·해방 등 좌경 과격 주장을 지지하지 못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김세진·이재호의 분신으로 흥분해 있는 학생들에게 기름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했다. 5월1일 민통련이 29일의 선언을 부정하고 공동기구 탈퇴를 발표했으나 이미 차는 떠난 뒤였다. 게다가 4월30일 열린 전두환과 3당 대표 회담에서 전두환이 임기 중 개헌 가능성을 시사함으로써 신민당이 전두환과 타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광범하게 번져가고 있었다. 서노련의 눈에 신민당은 ‘전두환 군사독재에 다음 가는 미국의 제2중대’에 불과했다.

5월3일 날이 밝으면서 온갖 정파의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인천으로 모여들었다. 신민당 행사가 시작되기도 전인 정오 무렵부터 이미 대회장인 주안 시민회관 앞 4거리는 시민·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리라는 것이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으나 경찰은 불심검문도 하지 않았고 출입통제도 하지 않았다.

정오가 조금 지나 주안1동 성당에서 인사연이 중심이 된 한 무리의 시위대가 나오면서 시위는 시작됐다. 순식간에 정파별로 집결한 시위대는 시민회관 앞 4거리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진출해 경찰과 대치했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했고 얼마 안 있어 근처에 있던 민정당사에 화염이 솟구쳤다. 시민회관 앞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신민당 지도부는 대회장에 입장조차 하지 못했다.

길거리는 온갖 구호가 적힌 유인물로 가득 찼다. 민통련은 “군부독재 타도하고 민주정부 수립하자”고 주장했고, 서노련은 “속지 말자 신민당. 몰아내자 양키놈”이라고 외쳤다. 그밖에 “가자! 해방구 인천으로” “철천지 원수 미제와 그 앞잡이 깡패적 반동정권의 심장부에 해방의 칼을 꽂자” “학살원흉 처단하고 신민당 배격하자”는 구호도 적혀 있었다.

민주화운동 진영의 통일대오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민통련은 시민회관 앞 노상에서 ‘민주화촉진 인천시민대회’를 열고 있었고, 학생들과 서노련은 “살인정권 전두환 일당과 미제놈들”을 몰아내고 “인천을 해방구”로 만들기 위해 화염병과 보도블록으로 무장한 채 외곽에서 경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수많은 시민들은 뿌연 최루탄 연기 속에 이리저리 몰려다닐 뿐이었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을 무렵 민통련을 대표해 장기표(전 녹색사민당 대표)가 서노련 책임자 김문수(현 한나라당 의원)와 만나 공동집회를 열어 함께 투쟁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민통련이 서노련 시위대를 맞이하기 위해 집회 가운데를 비워주는 순간 서노련 시위대는 스크럼을 짠 채 그냥 통과했고 민통련 집회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서노련의 눈에 민통련은 신민당의 아류 재야인사에 불과했다. 그것으로 공동투쟁의 기회는 완전히 사라졌다.

5시가 될 무렵 다연발 최루탄을 난사하며 진입한 경찰에 의해 주안4거리 시위는 일단 진압됐다. 그러나 흩어진 시위대는 이날 저녁 늦게까지 제물포와 주안 일대에서 파출소를 습격하는 등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했다.

다음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두환 정권의 반격이 시작됐다. TV는 불타는 민정당사와 경찰차, 난장판이 된 시민회관 앞 모습을 연이어 방영하며 시위의 폭력성을 부각했다. 경찰은 이번 시위가 좌경폭력세력에 의한 난동이라고 몰아갔다. 검찰은 소요죄를 적용해 129명을 구속했고 60여명을 수배했다. 이어 국군 보안사에 의해 서노련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다.

5·3 인천사태는 80년 5월 이후 최대의 시위였다. 그동안 크고 작은 투쟁을 통해 역량을 키워온 민주화운동권은 수도권 일대의 모든 역량을 투입해 이날의 결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운동권 내부의 분열로 이날 시위는 대규모 폭동 이상의 아무런 의의도 얻지 못한 채 해산되고 말았다. 관념적 급진주의는 오히려 대중을 등돌리게 만들었고 탄압의 빌미만 제공했다. 이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국면이 반전될 때까지 민주화운동은 수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5·3사태를 계기로 운동권 내부에서 반성의 기운이 싹트기에 이르렀다. 관념적 급진주의와 소아병적 헤게모니론이 비판대에 오르면서 현실에 뿌리박고 대중과 함께하기 위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6월항쟁이 준비되고 있었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 독자제보를 기다립니다. 경향신문 미디어부(02-3701-1156~8)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02-3709-7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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