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대통령’과 ‘대통령 딸’의 갈림길에 서다

2012.09.03 21:58

여전히 변함없는 ‘5·16, 유신 인식’… 최종 입장 정리 뭘지 주목

2007년 7월19일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청문회가 열린 서울 용산 백범기념관. 팽팽한 긴장 속에서 당 국민검증위원회 위원 보광 스님과 박근혜 경선 후보 간에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박 후보는 육영재단에서 나오는 1990년 잡지 인터뷰에서 ‘5·16과 4·19 뜻을 계승하고 3·1운동과 6·25 등에 연결시키면서 그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3·1운동과 5·16을 같이 연결시킬 수 있는지, 후보의 역사의식에 대해 상당히 의문이 갑니다.”(보광 스님)

“저는 5·16은 구국혁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상황이 너무나 나라가 혼란스러웠고, 남북 간 대치 상황에서 잘못하면 북한에 우리가 흡수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또 혁명공약에 보면 ‘기아선상에 헤매는 국민을 구제하고’ 이런 얘기가 나올 정도로 국민들이 기아선상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구국을 위한 혁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박근혜 후보)

이 장면을 기억하는 2007년 박 후보 캠프의 한 인사가 전한 당시 상황은 이렇다.

“ ‘구국의 혁명’이라는 이야기는 준비된 내용에는 없는 것이었다. 당시에 우리가 보고한 것은 ‘2차대전 뒤 독립국 중에 산업화에 성공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는 게 전부였다. 캠프서도 이 부분을 여러 차례 후보에게 주지시켰다. 그런데 검증 위원이 박 후보를 몰아붙이니 그렇게 대답한 것 같다. 박 후보가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참모들 보는 표정이 마치 잘못을 저지른 학생이 선생님을 보는 듯했다.”

5년이 지나서 지난 7월16일 박 후보는 대선출마 선언 직후 첫번째 토론회인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5·16 군사 쿠데타를 두고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주변 인사들은 “5년 전엔 딸로서 박 전 대통령을 대했다면, 이제는 앞선 세대의 정치지도자로 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박 후보의 인식은 변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박 후보는 5·16을 혁명이라고 기술한 대안 교과서를 만든 뉴라이트 계열 인사인 박효종 서울대 교수를 캠프에 포함시켰다. 후보 자신도 “(5·16이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내 발언에 찬성하는 국민이 50%가 넘는다”고 했다. 보수 진영에서조차 지도자의 역사인식이 헌법정신에서 벗어난다는 비판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왼쪽)가 지난해 8월27일 경북 청도군 신도리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성역화사업 준공식에 참석,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왼쪽)가 지난해 8월27일 경북 청도군 신도리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성역화사업 준공식에 참석,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2007년 “5·16은 구국의 혁명” 2012년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
역사인식, 정치 입문 전과 같아… 보수도 “헌법정신 위배” 비판

▲‘대통령의 딸’ 이미지를 넘어 대선 후보로서 홀로서기가 숙제
측근들 인식도 문제… “미래로 가자”며 민생 강조만으론 부족

■ ‘역사에 맡기고 미래로?’

박 후보는 2007년 이전에도 줄곧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말해왔다. 10·26으로 청와대에서 물러난 뒤 모습을 감췄던 그가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당시 박 후보는 박 전 대통령과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 일을 앞세워 공개행보에 나섰다. 1989년 5월19일 MBC 인터뷰에서 박 후보는 “5·16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저는 5·16이 말하자면 구국의 혁명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어떻게 군인이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느냐, 또 헌정을 중단시켰다,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이런 식으로 비판 일변도로 나오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글을 읽을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그럼 과연 5·16이 없다, 더 나아가서 그 후에 있은 유신이 없다고 할 때 5·16을 비판하고 심지어 매도까지 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이 땅이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나라가 없어지는 판에 민주주의를 중단시켰다 하는 얘기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이해가 안됩니다. 나라가 있어야 민주주의도 있는 거니까.”

남북 대치 상황을 고려할 때 5·16과 유신이 없었으면 ‘남한도 공산화됐을 것’이라는 인식이다. 이는 박 후보의 역사인식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다. 북한을 바라보는 박 후보의 인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예는 또 있다. 1979년 10월27일 새벽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이 박 대통령 서거 사실을 알리자, 박 후보는 “휴전선은 괜찮으냐”고 물었다고 한다. 김계원 실장이 증언한 바다.

2002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도 박 후보는 아버지를 옹호했다. 박 후보는 “아버지의 선택이 그 당시 국가지도자로서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아버지 시대에 피해를 보신 분들에겐 마음 아프게 죄송하게 생각한다. 요즈음 여론조사를 보면 많은 분들이 그 시절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박 후보의 인식은 청와대에서 나와 정치권에 입문하기까지의 18년, 아버지와 어머니의 명예 선양 활동에 집중했던 시기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1979년 10·26사건 이후 청와대에서 나온 박 후보는 추모사업회를 설립하고 <조국의 등불>과 같은 기록영화를 만드는 등 추모활동을 집중적으로 벌였다.

그는 앞서 언급한 MBC 인터뷰에서 ‘왜 그동안의 침묵을 깼느냐’는 질문에 “그동안 아버지, 특히 아버지가 하신 일에 대해, 제가 판단하기에는 왜곡된 여러 평가와 보도를 접하면서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많았다”며 “부모님에 대해서 잘못된 것을 하나라도 바로잡는 것이 자식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싶어 (언론 인터뷰에) 적극 응해왔다”고 말했다.

1989년 11월5일 일기를 보면 “나는 일을 해야 하는 운명이라, 그것도 비범하신 아버지를 모셨고, 생전이나 서거하신 후나 평범하지 않은 관심과 혹독한 비난에 시달리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바로잡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 자신 또한 평탄하지 못한 길을 가고 있다”고 적기도 했다.

‘아버지의 딸’이라는 강한 정체성이 대통령 후보라는 ‘공인’의 정체성을 뒤덮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주변에선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포은(정몽주)에게 물으면 역성 혁명이라고 하겠지만, (손자인) 세종대왕에게 물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박 후보도 세종대왕과 같은 입장 아니겠느냐”(홍사덕 전 캠프 공동선대위원장)는 변호도 나온다. 하지만 ‘박정희의 딸’이 아니라 ‘정치인 박근혜’로서 객관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은 끊임없이 나온다.

[새누리 후보 박근혜 뒤집어보기](4) ‘대통령’과 ‘대통령 딸’의 갈림길에 서다

역사인식을 놓고 비판이 제기될 때 박 후보는 요즘 “그것은 역사 논쟁의 영역이다. 우리는 민생에 신경쓰자”고 말한다고 한다. 그는 지난달 20일 대선 후보 확정 후 기자 간담회에서 “5·16에 대해 오랜 몇 년간 혁명이라고 교과서에 나온 적도 있고, 군사정변이라고 한 교과서도 있고, 쿠데타라고 한 교과서도 있다. 국민 생각이 다양하다”며 “정치권에서 그러면(문제화하면) 국민을 분열시키는 것 아닌가. 누가 강요할 수도 없다. 정치권에서 해야 할 일 뒤로 제쳐놓고, 민생도 제쳐놓고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를 두고 한 당내 인사는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국민과 그렇지 않은 국민,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옳지 못한 사람으로 편가르기하고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주변 인사들의 역사인식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박 후보 경선 캠프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지낸 홍사덕 전 의원은 지난달 29일 “유신이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수출 100억달러를 못 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는 “유신시대에 고통받은 사람에게 사과하고 유감도 표하고 그거야 당연히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강조점은 “유신의 다른 측면”에 찍혀 있다. 홍 전 의원은 “1971년도까지 10억달러 수출을 하다 1977년 100억달러를 달성했는데 조선·자동차·석유화학공단 등 큰돈이 들어가는 산업을 하려면 권력 집중 같은 것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포은과 세종대왕론’과 마찬가지로 박 후보의 역사인식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란 점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도 풀이된다.

박 후보 측에서 이런 말들이 나오자 새누리당에 관여했던 한 외부 인사는 “여러 차례 이 문제를 지적했는데 전혀 변하지 않는 박 후보 진영의 모습에 정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새누리당에 관여했던 내 심정이 이런데, 아무리 통합을 한다고 말을 한들 중도에 있는 국민이 마음을 열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과거와의 화해 어디까지 갈까

박 후보가 유신 피해자들에게 화해의 목소리를 전혀 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2004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방문해선 “아버지 (집권)시절에 많은 피해를 입고 고생한 것을 딸로서 사과드린다”고 했고, 2007년 장준하 선생 부인인 김희숙씨를 방문하기도 했다. 2012년엔 과거 정치적으로 반대했던 세력과의 화해를 의미하는 듯 대선 후보로서 첫 행보로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의 김 전 대통령 묘역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이 있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았다.

하지만 진짜 과거와의 화해를 원하느냐를 두고는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말도 나온다. 2007년 박 후보가 장준하 선생의 유족을 만나러 갈 당시 한 참모는 박 후보가 내켜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전한다. “박 후보와 부인 두 분이 앉을 공간밖에 안 나올 정도로 좁은 곳이라 서로 인사를 하면서 머리를 살짝 부딪쳤는데, 그런 이후에도 두 분 다 말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아직 준비가 안돼 있었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최근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이 다시 제기되는 것을 두고도 박 후보는 ‘정치적 의도’를 먼저 의심하는 분위기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도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진상조사위원회에서 몇 년간 조사했다. 그 전 정권에서도 했고 또 조사할 게 있다고 하면 해야겠다”면서도 “그런데 기본적으로 우리 정치권이 미래로 나갔으면 좋겠다. 계속 과거 이야기만 하고 있다. 그것만 옳으니 그르니 하고 있는데 그렇게 할 여유가 우리 정치권에 있나”라고 말했다.

[새누리 후보 박근혜 뒤집어보기](4) ‘대통령’과 ‘대통령 딸’의 갈림길에 서다

박 후보는 과거사 논란이 생길 때마다 색깔론이나 정체성 논란으로 대응해왔다. 참여정부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 등을 두고는 “간첩이 민주인사로 둔갑하고 간첩이 군 장성을 조사하는 잘못된 일이 또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인데, 야당이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느냐”고 말했다. 2007년 6월19일 대선 경선의 통일·외교·안보 분야 정책비전 대회에서 원희룡 후보는 “기회될 때마다 유신 피해자에게 사과한다고 했는데 인혁당 사건 희생자 가족 등이 만남을 요청하면 응할 의향이 있나”라고 물었다. 박 후보는 “제가 진심으로 사과드리는 것은 민주화를 위해 순수하게 헌신한 분들인데, 또 한 부류의 세력이 있고 이들은 친북의 탈을 쓰고 나라의 전복을 기도한 사람”이라며 “이는 분명 잘못된 것 아닌가. 이것이 혼동되면 진심으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했다.

박 후보의 근본적인 역사인식이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관심은 박 후보가 5·16 쿠데타 재평가에 돌입할 것인가 여부에 쏠린다. 이미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 포럼’이 주체가 돼 5·16을 혁명으로 규정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펴냈다. 박 후보는 2008년 5월 이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뜻있는 이들이 현행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청소년들이 잘못된 역사관을 키우는 것을 크게 걱정했는데 이제 걱정을 덜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과거를 다 덮고 미래로 가자’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는 박 후보 주장이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사례에서 보듯 역사 다시 쓰기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온다.

이런 우려를 의식한 탓인지 박 후보 주변에서 과거사 관련 행보를 두고 ‘결국 관건은 진정성’이라는 말이 나온다. 한 측근은 “100%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했고 화해 행보를 시작했는데 유신의 피해자들도 못 만날 이유가 없다. 다 함께 갈 것”이라며 “문제는 박 후보의 진정성을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될 것이고 그걸 두고 여러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 출발선에서 박 후보의 과거사 정체성은 분명 ‘대통령의 딸’이었다. 지금은 그것과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 사이, 어디쯤엔가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최종 선택의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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