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힝야는 미얀마 민족 아니다" 한국의 미얀마인이 말하는 로힝야

2017.10.03 09:40 입력 2017.10.03 09:41 수정

1990년 군부 탄압을 피해 한국으로 건너온 윈라이씨가 지난달 24일 인천의 한 커피숍에서 로힝야 사태에 대해 말하고 있다.

1990년 군부 탄압을 피해 한국으로 건너온 윈라이씨가 지난달 24일 인천의 한 커피숍에서 로힝야 사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난달 24일 국내 거주 미얀마인들이 서울 중구의 유엔난민기구(UNHCR) 한국대표부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로힝야는 미얀마의 소수민족이 아니다”라며 “아웅산 수지여사와 미얀마 정부를 지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집회 참가자 중 상당수는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애써온 이들이었다. 군부와 맞서다 나라에서 쫓겨나야 했던 이들이 왜 군부의 박해를 받고 있는 로힝야 난민들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일까. 미얀마인들은 왜 그토록 로힝야인들을 미워하는 것일까.

집회를 준비한 사람 중 한명인 윈라이씨(45)를 지난 29일 인천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윈라이씨는 대학 2학년이던 1990년 민주화 시위를 벌이다 군부의 체포 대상이 됐고 1992년 한국으로 피신했다. 올해로 한국 생활 25년째. 이제는 미얀마보다 한국에서 산 날이 더 많아졌다.

■“로힝야는 미얀마 민족이 아니다”
-로힝야 사태 뭐가 문제인가

“로힝야 사람들은 미얀마 민족이 아니다. 그게 문제다. 민족이 아닌데 자꾸 민족이라고 주장하니 문제가 생기는 거다. 미얀마에 소수 민족은 많다. 카친족, 카렌족, 샨족 그 사람들 모두 미얀마의 민족들이다. 하지만 로힝야는 아니라는 거다.”

-로힝야가 미얀마 민족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라카인 땅을 차지하려는 거다. 독립 시켜달라는 얘기다. 나 같은 이방인이 인천 같은데 많이 들어왔다고, 땅을 떼달라고 하면 한국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일 수 있나.”

윈라이씨의 주장은 미얀마 정부 입장과 일치한다. 1992년 미얀마 외교부는 로힝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오늘날 미얀마에는 135개 소수민족이 있지만, 로힝야라 불리는 사람들은 이들 중 하나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미얀마에 ‘로힝야’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로힝야라는 이름은 라카인주 반군 집단이 만들어낸 이름이다. 이들은 1824년 1차 미얀마-영국 전쟁 이후 미얀마 인근 지역에서 불법적으로 넘어온 무슬림 집단이다. 불법 이민자들이기 때문에 이들은 다른 미얀마 민족들처럼 영주권을 가질 수 없다.” 이런 입장은 2015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가 승리하고 민주 정부가 들어선 뒤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8월25일 라카인주 경찰 초소를 습격해 군부의 군사작전을 촉발한 로힝야 반군 무장조직 ‘아라칸로힝야구원군(ARSA)’.  가운데 남성은 자신이 ARSA 사령관 아탈루아 아부 주누니라고 밝혔다. 유튜브 캡처

지난 8월25일 라카인주 경찰 초소를 습격해 군부의 군사작전을 촉발한 로힝야 반군 무장조직 ‘아라칸로힝야구원군(ARSA)’. 가운데 남성은 자신이 ARSA 사령관 아탈루아 아부 주누니라고 밝혔다. 유튜브 캡처

로힝야 민족주의자들은 8세기 무렵 라카인주에 나타난 중동 지역 무슬림 상인들의 후예라고 자처한다. 1300년 가까이 미얀마 땅에서 살아온 토착 민족 중 하나라는 주장이다. 이는 로힝야 일부가 분리독립 또는 자치권을 요구하는 근거로도 작용한다. 원래부터 살고 있었던 땅이니 독립이나 자치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로힝야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은 평행선만 달리고 있다.

-로힝야가 19세기 들어서 미얀마로 건너왔다고 해도 벌써 160년이나 지났다. 그정도면 미얀마의 민족으로 인정할 수 있지 않나.

“그 사람들 미얀마 말 하나도 모른다. 방글라데시 말 쓴다. 카친이나 카렌족은 다르다. 자기들 말도 할 줄 알고 미얀마 말도 할 줄 안다. 카렌족끼리는 카렌말 쓰다가도 버마족이나 다른 소수민족들하고는 또 미얀마 말로 대화한다. 로힝야는 언어나 생김새나 방글라데시인에 가깝다.”

-지금 난민들이나 라카인주 로힝야족을 방글라데시가 책임져야 한다는 뜻인가.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겠다. 너무 큰 얘기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미얀마 민족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미얀마인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미얀마 사회에 들어와서 평화롭게 살자는 거다. 미얀마에 넘어와 오래 살았다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른 미얀마 사람들도 같은 생각일 거다. 미얀마 국가도 부르고 말도 배우고 하면서 같이 살라는 거다. 하지만 로힝야는 그럴 생각이 없다.”

■“투투도 달라이라마도 미얀마를 모른다”
1962년 쿠데타로 네윈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미얀마는 소수민족의 ‘미얀마화’를 밀어붙였다. 소수민족 정체성을 말살하려 했고 또 한편에서는 소수민족과 버마족의 갈등을 부추겼다. 전형적인 분할통치다. 윈라이씨는 “평화롭게 살면 된다”고 강조했지만 소수민족이 미얀마 사회 안에서 차별 대우를 받은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윈라이씨는 “군부독재 세력들이 특히 종교를 앞세워서 분열을 일으키면서 문제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소수민족 차별도 군사정권 시기 특히 심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민주정권이 들어섰으니 그런 문제는 차츰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8월25일 이후 지금까지 방글라데시로 피신한 로힝야 난민은 50만명이 넘었다. 벵골만 바다를 건너다 배가 전복돼 숨진 사람도 60명에 가깝다. 유엔은 로힝야 사태를 ‘인종청소’로 규정했다. 데스먼드 투투 대주교, 말랄라 유사프자이 등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비롯해 전세계에서 아웅산 수지 국가자문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달라이라마도 “부처라면 로힝야 난민들을 도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윈라이씨는 ‘인종청소’에 동의하지 않았다. 세계에서 이어지고 있는 비판에 대해서도 “미얀마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말했다.

데스먼드 투투 대주교(왼쪽)와 말랄라 유사프자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이들은 같은 평화상 수상자 아웅산 수지 미얀마 국가자문이 로힝야 사태에 침묵하고 있다며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데스먼드 투투 대주교(왼쪽)와 말랄라 유사프자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이들은 같은 평화상 수상자 아웅산 수지 미얀마 국가자문이 로힝야 사태에 침묵하고 있다며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로힝야의 주장을 차치하고, 그런 식으로 군사작전을 펼친 건 문제가 아닌가. 유엔도 ‘인종청소’라고 비판하고 있다.

“정말 인종청소를 할 생각이었다면 아예 도망도 못치게 하지 않았을까. 군부보다 오히려 테러조직 위협 때문에 도망친 사람들이 더 많을 수도 있다. 테러조직들은 자기 말 안들으면 다 죽이니까. 그게 무서워서 도망쳤다는 거다. 군부도 이제는 정부 눈치를 안볼 수가 없다. 예전처럼 마음대로 행동하기 어렵다.”

-군사작전이 문제가 아니라는 건가.

“분쟁이 벌어졌을 때 난민이 생기는 건 사실 어디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군사작전도 지난 5일 이후 중단됐다. 그런데 그 이후로 넘어간 난민들이 더 많아졌다. 이상한 일이다.”

-투투 대주교나 유사프자이가 수지 정부를 비판했다. 달라이라마도 한마디 했다.

“그분들도 미얀마 역사를 모른다. 달라이라마는 종파는 다르지만 불교 지도자로 미얀마 안에서도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분도 미얀마 역사는 잘 모른다. 라카인 현장에 가본 것도 아니지 않나.”

-당신도 현장은 가보지 못했다. 미얀마를 떠난지 25년이 지났다.

“소식은 계속 듣고 있다. 남아 있는 친구들도 있다. 미얀마가 어떻게 변했는지 이야기 많이 듣는다.”

윈라이씨의 주장은 지난달 19일 수지 국가자문의 연설과 많이 겹쳤다. 수지가 “미얀마는 복잡한 나라다. 분쟁지역 뿐 아니라 나라 전체를 봐달라”고 했던 것처럼 윈라이씨는 국제 사회가 미얀마의 현실을 잘 모른다고 말했다. 윈라이씨는 “라카인 무슬림 마을 중 피신하지 않은 곳도 많다”고 했던 수지의 발언도 강조했다. 남아있는 로힝야 무슬림들은 미얀마 민족과 평화롭게 지내고 싶어 하는 이들이라는 얘기다.

수지 국가자문은 연설에 앞서 지난달 5일 내놓은 성명에서 “가짜정보가 넘쳐난다”고 주장했다. 윈라이씨는 한쪽 면만 보려고 하는 서방 언론이 문제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미얀마이들이 모여 집회를 연 것도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그는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이 내놓은 로힝야 해법이 가장 현실적인 답이라면서 정부 쪽에서도 이를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는데 서방 언론은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난 전 총장은 로힝야족에 시민권을 부여하고 기본권을 보장하는 등 방법을 통해 라카인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수지는 성명과 연설을 통해 정부가 아난 총장의 제안을 어떻게 추진하고 있는지 강조해왔다.

-서방 언론에 불만이 많다고 했다.

“양쪽을 다 살펴야 하는데 처음부터 로힝야쪽 눈에서만 보니까 뭔들 좋게 보이겠나. 라카인주 사태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지역 힌두교도들이다. 하지만 서방 언론은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

-힌두교도들이 피해 입은 것도 군사작전 때문 아닌가.

“그렇지 않다. 군부 공격 때문이라면 힌두교도들도 나라 밖으로 도망쳐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 사람들은 군부가 있는 나라 안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로힝야 무장조직에 당했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지금 나라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은 로힝야족 밖에 없다. 힌두교도들 포함해서 라카인주의 다른 소수민족들은 다 미얀마 안으로 도망왔다. 로힝야는 미얀마 안보다 바깥이 더 편한 거다.”

지난달 28일 라카인주 북부 마웅토의 한 야산에서는 힌두교도 시신 28구가 묻힌 집단무덤이 발견됐다. 미얀마군은 이들이 경찰 초소를 습격해 라카인 사태를 촉발한 로힝야 반군 ‘아라칸로힝야구원군(ARSA)’에 살해당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가자문실은 아직까지 힌두교도들을 집단 살해한 주체에 대해 명확하게 답하지 않고 있다.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입장만 내놨다.

■“로힝야만 조용히 살면 문제는 해결된다”
윈라이씨는 로힝야가 민족으로 인정받는 것을 포기하고, 미얀마 사회의 일원이 된다면 문제는 해결된다고 말했다.

그는 로힝야 무슬림과 버마족 불교도 사이 충돌의 근본원인처럼 얘기되고 있는 종교 문제는 실상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자신은 버마족 불교도지만 어린 시절 무슬림이건 기독교도건 가리지 않고 다같이 친구로 지냈다고 했다. 같은 시기 활동한 대학 학생운동 리더들 중에도 무슬림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불교 극단주의자들이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은 맞지만 대다수 미얀마인들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윈라이씨는 미얀마의 반이슬람 불교 극단주의 승려 아신 위라투를 거론하며 “그가 하는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극우 불교단체 ‘마바타’를 대표하는 위라투는 “무슬림들이 나라 전체를 집어삼키려 한다”며 “로힝야 무슬림들을 쫓아내자”는 식의 선동 발언으로 증오를 조장하는 인물이다. 윈라이씨는 “우리가 믿는 상좌부불교는 그런 거칠고 폭력적인 말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다. 나도 어릴 때 그렇게 배웠다”고 말했다.

아웅산 수지 미얀마 국가자문이 수도 네피도의 국제컨벤션센터에서 로힝야 사태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그는 난민 송환 문제 등을 해결하겠다고 밝혔지만 서방 언론 등 국제사회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AP연합뉴스

아웅산 수지 미얀마 국가자문이 수도 네피도의 국제컨벤션센터에서 로힝야 사태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그는 난민 송환 문제 등을 해결하겠다고 밝혔지만 서방 언론 등 국제사회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AP연합뉴스

그는 식민종주국 영국이 조장한 버마족과 로힝야족 사이의 ‘구원’도 이제는 많이 아물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2차대전 시기 영국은 자치권이나 독립을 내걸어 로힝야 등 소수민족을 무장시키고 버마족을 공격하게 했다. 1942년 라카인주에서 로힝야족과 버마족 사이 충돌 때는 2만5000명이 사망했다. 윈라이씨는 “그런 감정 문제가 완전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2차대전 시기 로힝야뿐 아니라 카렌, 카친 같은 다른 소수민족들도 대거 영국군 편에 섰지만 지금 이들의 상황은 로힝야와 다르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윈라이씨는 방글라데시로 도피한 로힝야 난민들도 다시 받이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윈라이씨는 1982년 제정된 ‘시민권법’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법의 내용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최소한의 기준’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민권법은 애초에 로힝야를 배제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라는 비판이 많다.

시민권법은 미얀마 시민을 완전시민(full citizen), 연합시민(associate citizen), 귀화시민(naturalized citizen)의 세 범주로 구분하는데, 로힝야족은 어디에도 속하기 어렵다.

완전시민은 1823년 제1차 미얀마-영국 전쟁 이전부터 미얀마에 살았던 135개 소수민족을 가리킨다. 로힝야는 여기에 속할 수 없다. 윈라이씨가 주장하는 것처럼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이 영국 식민지 시기 이후부터 인근 지역에서 넘어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연합시민은 1948년 독립 이전 미얀마에 입국해 정착했고, 미얀마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으며, 미얀마에서 아이를 낳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로힝야족 가운데 이 조건을 충족하는 이는 많지 않다. 조건을 충족한 소수 역시 정부당국의 재량권 행사로 대부분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 로힝야족에게 남은 선택지는 사실상 귀화시민 뿐이었는데, 이들의 귀화신청 역시 대부분 거부당했다. 윈라이씨가 ‘최소한의 기준’으로 제시한 시민권법을 적용하면 로힝야 난민 50만명 중 미얀마로 돌아올 수 있는 이는 극소수에 그칠 공산이 크다.

수지 국가자문은 지난달 19일 연설에서 “난민 송환을 위한 (신원) 확인 절차를 언제든 시작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신원을 확인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지난 2일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양국은 난민 송환을 위한 실무그룹을 구성하는데 합의했다. 실제 송환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지는 알 수 없다.

윈라이씨는 1990년 군부가 총선거를 무효화하자 이에 반발해 시위를 벌였다. 함께 시위에 나섰다가 군부의 총에 맞아 숨진 친구들도 적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한국으로 피신했고, 영주자격을 획득해 지금까지 머물고 있다. 위조한 신분증으로 나라를 떠난 탓에 아직도 미얀마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라고 했다.

한국말 한마디도 할 줄 몰랐던 그는 박스 포장 일부터 온갖 일로 생계를 꾸렸다. 일이 힘들어 화장실에서 몰래 울기도 여러번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국의 미얀마인들과 함께 본국의 민주화를 위해 꾸준히 애써왔다. 한국인들에게 미얀마의 상황을 알리고 지지를 호소했다. 집회도 꾸준히 열었다.

수지의 2015년 총선 승리로 이제 더는 시위도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로힝야 사태로 다시 거리에 나서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로힝야 관련 시위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에게 “지금 로힝야인들도 25년전 당신처럼 절박한 심정이 아니겠느냐”고 물었다. 윈라이씨는 “그건 전혀 다른 문제”라고 답했다. “우리가 로힝야인들 다 쫓아내라고 주장하는게 아니다. 미얀마 법에 따라 이주민들로 조용히 살면 해결되는 문제다. 로힝야만 조용히 살겠다고 한다면 미얀마 다른 민족들도 대부분 받아들일 것이다.” 그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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